역사상 가장 많은 부를 축적한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요?
부자라고 하면 아마존의 베조스나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를 생각하게 되겠지만, 이 현대의 부자들을 역사상 최고의 부자로 보긴 힘들겠지요.
당장 미국만 하더라도 석유재벌 록펠러가 당대에는 이들보다 훨씬 더 부유했을 테니까요.

이 책의 제목이 말해주듯, 역사상 최고의 부자는 독일사람 푸거(Jacob Fugger)라네요.
그가 축적한 재산이 당시 유럽 전체 총생산의 2%에 해당하는 크기였다니 상상을 초월하는 부자였던 것이지요.
1459년 독일 아우그스부르크(Augsburg)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광산업과 금융업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습니다.
직물, 향신료, 보석 등의 거래로 많은 이익을 남기기도 했구요.

그가 부를 축적한 과정을 보면 당시의 부패한 정치, 종교권력과의 결탁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세속적 권력을 대표하는 것은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의 황제였습니다.
여러분이 세계사 시간에 배우셨겠지만, 8명 내외의 선제후(Elector)들이 황제를 뽑는데, 그 과정에서 온갖 부정과 협잡이 난무했나 봅니다.

선제후들에게 엄청난 금액의 뇌물을 건네주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래서 황제 자리에 앉는 사람들은 엄청난 빚더미 위에 올라타게 되었습니다.
황제뿐 아니라 왕, 귀족들도 숱한 전쟁을 치르느라 엄청난 경비를 지출해야 했기 때문에 여기저기에 빚을 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루터(M. Luther)의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시기였는데, 종교권력 역시 세속권력 못지않게 부패해 있었던 상황이었지요.
예를 들어 뇌물을 바쳐야 주교 자리라도 얻을 수 있었던 때였으니까요.
공공연히 면죄부(indulgence)를 사고 팔 정도로 종교권력이 돈을 탐했던 시대였고, 따라서 이들도 돈 거래의 단골 고객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돈놀이를 주업으로 했던 푸거에게는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려 있었던 셈이었지요.
돈 빌려 달라고 구걸하다시피 달려드는 왕과 귀족, 성직자들에게 배짱을 튕기면서 이런저런 이권을 요구할 수 있었으니까요.
푸거가 은, 구리, 수은 등의 광산업으로 큰돈을 벌게 된 계기가 바로 이 과정에서 획득한 채굴권 덕분이었습니다.

푸거는 신성로마제국의 맥시밀리안 1세(Maximilian I)와 카를 5세(Karl V) 황제의 선출에 결정적 기여를 합니다.
(선제후에게 줄 뇌물의 자금 공급원 역할을 했으니까요.)
그들이 황제로 선출된 후에도 이런저런 일로 돈이 필요할 때마다 막대한 금액을 빌려주고 엄청난 이권을 챙겼지요.
이 책의 거의 전부가 그런 이권에서 얼마나 큰 이득을 얻었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푸거는 그 이권만을 이용해 막대한 부를 만들어낸 것은 아닙니다.
요즈음 말하는 동물적 감각으로 유망한 투자대상을 찾아내고 때로는 독점력을 통해 이윤을 키우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는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태동하고 있던 시절이었는데, 말하자면 그런 시대의 영웅 노릇을 한 것이지요.
그래서 독일 사람들은 그를 무척 존경해 우표에 그의 얼굴을 싣기도 했습니다.

철두철미한 사업가였던 푸거를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악덕’ 기업가라고 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온갖 수단을 동원해 이윤을 추구한 그의 모습이 냉혈한처럼 보일 수 있다는 점은 저자도 선뜻 인정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윤리가 제대로 확립되지 않는 당시의 상황에서는 모두가 맹목적인 이윤동기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는 사정을 이해해 줘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와 이권적 관계로 밀착되어 있던 푸거는 루터의 교회 개혁운동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또한 농민들의 봉기로 내전이 일어났을 때 철저하게 기존 권력의 편을 들었습니다.
말하자면 반동적인(reactionary) 태도의 소유자였던 셈이지요.

저자는 푸거를 동시대의 또 한 사람의 풍운아인 뮌처(T. Muntzer)와 비교해 평가하고 있습니다.
성직자인 뮌처는 혁명을 부르짖은 급진적 사고방식의 소유자로서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푸거와 대척점에 서 있던 사람입니다.
농민혁명에 앞장서 사회개혁을 꿈꿨으나 기존 권력의 철옹성처럼 강한 성벽을 뚫는 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과거 독일이 서독과 동독으로 나뉘어 있을 때 서독정부는 푸거의 초상을 우표의 도안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를 자본주의의 영웅으로 부각시키려는 의도였겠지요.
반면에 동독 정부는 혁명아 뮌처의 초상을 5마르크 지폐에 그려 넣었구요.
동시대를 산 두 사람이 매우 흥미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실권은 별로 없었다고 하지만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유럽의 절반 정도를 대표하는 세속권력의 표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대금업자 푸거에게는 그들이 한낱 빚쟁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개 상인에 불과한 푸거가 황제에게 빚을 빨리 갚으라는 무엄한 편지를 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 도움이 없었다면 당신은 황제가 될 수 없었다."라는 말까지 있는 독촉 편지를 읽으면서 황제는 과연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이 책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단연코 최고의 권력이라는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PS. 이 책은 생생한 실례를 통해 15, 16세기 유럽의 역사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장점도 갖고 있습니다.

양종훈

2021/12/30

김앤장 소속의 어느 변호사는 판사 시절에 돈이 많은 사람은 돈으로 죗값을 치를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현재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피땀을 흘리고 목숨까지 내놓았습니다. 그럼에도 판사란 사람의 인식이 저러니, 그 희생들이 무슨 의미가 있었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