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도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내 제자들 중에는 정관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그 중에는 학생시절 나와 매우 친하게 지낸 사람들이 꽤 많은데, 흥미로운 점은 나와 생각이 다른 제자들도 의외로 많다는 사실입니다.
하기야 나의 대형 강의를 한 두 번 들은 정도로 나에게서 무슨 큰 영향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 동안 줄곧 수강생이 거의 이백 명 내외인 대형 강의만 맡아 왔습니다.)

이혜훈 전 의원은 정관계에서 많은 활약을 하고 있는 제자들 중 하나입니다.
내가 서울대학교에 처음 부임한 것이 1984년이고 이 의원은 82학번이었으니 그가 3학년 때 처음 만난 거지요.
학부생 시절의 이 의원은 조금 수줍은 데가 있어 나와 많은 교류가 있지는 않았습니다.

재미있는 건 학생시절의 관계와 졸업 후 사회에 나가서의 관계가 반드시 정비례 관계에 있지는 않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학생 시절에는 가까이 지냈으니 졸업 후에는 연락이 끊어진 경우도 많고, 반면에 학생 시절에는 그리 가깝게 지내지 않았으나 졸업 후에는 오히려 더 가까워진 경우도 많습니다.
이 의원은 후자의 경우, 즉 졸업 후에 더 가까워진 경우에 해당합니다.

졸업 후 갑자기 연락을 받게 된 것은 그가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연구원으로 일할 때였습니다.
당시에는 이름조차 생소하던 예비타당성조사 제도 도입을 위한 준비작업을 하고 있는 과정에서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그 취지에 동감하기 때문에 선뜻 그러겠노라 했고, 그 과정에서 자주 만날 기회를 가졌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듯 예비타당성조사 제도는 국가재정법에 성공적으로 안착되었고, 그 결과 5백억원 이상이 소요되는 공공사업은 사전에 경제성 평가를 반드시 거쳐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정부든 정치적 목적의 선심성 사업에 눈독을 들이게 마련이고, 그 결과 아까운 재정이 낭비되는 사례가 수없이 많습니다.
이런 낭비를 막는다는 점에서 예비타당성 조사는 그 동안 우리 사회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제도가 국가재정의 낭비를 물샐 틈 없이 막는 수문장 역할을 제대로 해온 것은 아닙니다.
정부가 마음먹기만 하면 얼마든 이 제도를 건너뛸 수 있는 여지가 있고, 실제로 그런 사례가 종종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누가 봐도 낭비적 사업인 것이 분명한데도 버젓이 완공 테이프를 끊은 경우가 한 둘이 아닙니다.

그 대표적 사례가 아라뱃길이라고 부르는 경인운하사업입니다.
여러분들 지금 그 운하에 배들이 활발히 오가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습니까?
오가는 배들을 찾아보기 힘든 그 운하지만, 예비타당성조사를 당당히 통과한 사업입니다.
처음에는 타당성이 없다는 평가 결과가 나왔지만, 정부가 집요하게 재평가를 요구해 결국 경제성이 있다는 평가가 나오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경인운하사업에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갔는지 정확히 모릅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간 게 분명할 텐데, 그런 막대한 낭비를 초래한 데 대해 책임을 진 사람을 단 하나도 본 적이 없습니다.
경제성이 있다고 평가한 사람도, 그 사업을 실제로 추진하고 수행한 사람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것을 밀어붙인 MB정부가 국민에게 사죄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구요.

예비타당성조사 제도가 완전히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그 결과 천문학적 예산 낭비가 일어났던 결정적 사례가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4대강사업’입니다.
여러분들 22조원(+알파)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이 투입된 그 사업에서 우리 국민이 얻은 편익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사업을 밀어붙인 측에서는 홍수 방지와 가뭄 대비 등의 측면에서 성과를 거뒀다고 강변합니다.
그러나 그 성과를 금액으로 환산하면 불과 1조원도 되지 못할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이런 낭비적 사업이 이떻게 예비타당성조사 제도의 장벽을 넘어갔느냐구요?
MB정부가 국가재정법의 예외 규정을 악용해 이 사업을 아예 예비타당성조사 대상에서 빼버렸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소위 ‘예타 면제’ 규정을 악용함으로써 그런 엄청난 낭비를 초래한 것이지요.

재난방지의 목적을 가진 공공사업의 경우에는 예타 면제가 적용되는 예외 규정이 있습니다.
4대강사업이 홍수 방지와 가뭄 대비의 성격을 갖는다는 억지 논리로 이를 재난방지 사업으로 둔갑시켜 그 예외규정의 적용을 받을 수 있었던 겁니다.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억지 논리였지요.

최근 가덕도 신공항 건설을 둘러싸고 이 예타 면제의 예외 조항이 또다시 논란의 핵심으로 등장할 조짐이 보입니다.
얼마 전 여야 합의로 전격 통과된 가덕도 신공항 특별법을 통해 예타 면제의 적용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군요.
이것이 엄청난 예산 낭비를 가져올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커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 드려 난 어떤 구체적 근거에서 그 사업에 예타 면제가 적용될 수 있는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상식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머리에 선뜻 떠오르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국가재정법에 따르면 지역 균형발전에 도움이 되거나 긴급한 사정으로 국가 차원의 추진이 필요한 등의 경우에 예외를 인정해 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덕도 신공항의 경우는 이 둘 중 어느 것에도 해당되는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정부와 여당이 어떤 예타 면제의 구실을 갖다 붙인다 해도 궁색한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야당까지 가세해 특별법을 통과시킨 것은 결국 이 사업이 경제적 목적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에서 추진되고 있음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덕도 신공항 사업이 제2의 4대강사업이 될 수 있다는 뼈아픈 지적이 나오게 된 것 아닙니까?

난 근본적으로 신공항 건설이 뭐가 그리 시급한 사업이라고 그렇도록 성급하게 밀어붙이는지 그 자체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정부, 여당의 태도를 보면 마치 무엇에 쫓기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서두르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설사 백보를 양보해 사업의 조속한 추진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런 정도로 성급하게 추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 속담에 “아무리 바빠도 바늘허리 매어 쓰지는 못한다.”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런 정도의 대형사업이라면 순리에 맞게 하나하나 신중하게 따져가며 추진하는 것이 정도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나는 지금처럼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는 정부가 경기부양을 위해 토목사업을 어느 정도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 사업에나 마구잡이로 예타 면제를 적용하는 무리수를 두어 가면서까지 토목사업을 밀어붙이는 것은 절대 반대입니다.
토목사업을 하되 경제성이 명백하게 확인된 것에 한해 규정과 절차에 맞도록 추진해야 마땅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요즈음처럼 재정지출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국가채무에 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한층 더 보수적인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런저런 사업에 모두 예타 면제를 적용하는 것은 국민의 눈에 방만한 재정운영으로 비칠 게 너무나도 뻔합니다.
예타 면제는 예리한 날을 가진 칼과도 같습니다.
이런 위험한 무기를 함부로 휘두르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앱클론

2021/03/15

작법자폐

Cer.

2021/03/16

솔직히 정치인들도 교수님께서 지적하신 바를 충분히 알고 있을 거 같은데요. 다만, 당장 눈 앞에 놓인 선거가 절박하고 국민들이 이런 사정을 잘 모르니까 그런 거 아닐까요?

이런 상황에서 "무분별한 예타 면제는 방만한 재정 운영으로 이어집니다."라고 소신껏 외치는 정치인 기대하는 게 어떻게 보면 더 비현실적입니다. 득표에 도움도 안 되는 그런 발언을 할 이유가 없죠. 그 정치인만 바보가 되는데

이준구

2021/03/16

사람들이 이기적 동기에서 행동한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요.
그러나 정치인도 국민의 심판을 염두에 두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Cer.

2021/03/16

아마 사람들이 이런 무분별한 예타 면제가 가져올 부작용에 대해 충분히 인지를 하고 있고 그러한 무분별한 예타 면제를 반대한다는 시그널을 계속 주면 정치인들도 이런 짓을 더 이상 하지 않을 겁니다.

제 주위 얘기이긴 하지만 예타 제도를 지역균형발전을 막는 악법 비스무리하게 취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결국 이런 무분별한 예타 면제를 방지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국민이 현명해지는 수 밖에 없을 거 같아요. 이런 무분별한 예타 면제에 대해 국민이 강력한 시그널을 주지 않으면 매 선거때마다 똑같은 일이 반복될 거 같습니다.

이준구

2021/03/16

언론이 이 글에 대해 보도한 기사 보니 가관이네요.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마치 했다는 듯 자기 마음대로 각색을 해서 보도하고 있어요.
예컨대 나는 가덕도 신공항 사업이 제2의 4대강사업이 될 수 있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한 게 결코 아닙니다.
본문을 다시 읽어 보시면 분명히 드러나지만 "제2의 4대강사업이 될 수 있다는
뼈아픈 지적이 나오게 되었다."라는 간접화법을 썼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는 의미지요.
그런데도 마치 내가 직접 그런 말을 했다는 식으로 제목을 뽑으니 아연실색할 수밖에요.
기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각색해 기사를 쓴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긴 하지만요.
인터뷰가 아닌 게 다행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게 바로 진실이 되고 무슨 말로도 해명이 불가능했을 테니까요.

양종훈

2021/03/17

그저 한숨만 나올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