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이 게시판에 『The Economists' Hour』라는 흥미로운 책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얼마 전에 부.키라는 출판사의 편집자로부터 이 책과 관련된 연락이 왔습니다.
이 책의 한국어 번역본을 출판하려 하는데, 그 글을 추천사로 써도 좋으냐는 문의였습니다.
독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좋은 책이기도 하고 이미 쓴 글인데 추천사로 사용하는 게 뭐가 문제냐는 생각에서 흔쾌히 응했습니다.

어제 증정본을 배송 받고 책을 열어 보니 또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충동이 생기더군요.
여기저기에 경제학자들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들이 너무 많이 소개되어 있어서요.
그 동안 내가 알고 있던 경제학자들은 모두 그들의 학문적 업적을 통해서만 알아온 것 아니겠습니까?
이 책에서 그려지고 있는 경제학자들은 훌륭한 학자이기 이전에 하나의 사람으로서의 체취를 강하게 풍기고 있습니다.
그런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하고 심지어 평소에 (이념적 차이로 인해)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던 경제학자마저 친근감을 느끼게 될 정도였습니다.

지난 글에서도 소개한 바 있지만 미국 사회에서는 경제학자들의 현실 참여가 매우 활발한 편입니다.
교수가 정부에 참여하고 언론에 글 쓰는 경우가 너무나도 흔해 폴리페서(polifessor)라는 말이 아예 존재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우리나라 교수들은 한 번 다른 길로 나가면 영영 그 길로 가버리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미국에선 학계로 돌아와 예전처럼 활발한 연구를 하는 사람도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가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미국 사회에서 경제학자들의 현실 참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60년대에 이르서였다고 합니다.
그 이전에는 경제학자들의 현실 참여가 그리 활발하지 않았고 따라서 사회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영향력이 그리 크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저자는 1969년부터 2008년에 이르는 기간을 "경제학자의 시대"라고 불러 그들이 미국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그 시대를 그냥 경제학자의 시대라고 불러 이 책의 제목으로 삼는 것은 어폐가 있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경제학의 영향력을 넓히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하는 경제학자들은 대부분 우리가 시카고학파(Chicago school)라고 부르는 보수주의 성향의 경제학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시카고학파의 거두인 프리드먼(M. Friedman)이 주역을 담당하고 있는 이 책의 제목은 엄밀하게 말해 "보수주의 경제학자의 시대"라고 달아야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1960년대까지는 케인즈경제학의 전성시대라고 부를 수 있는데, 시카고학파의 도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 바로 1960대이고 이 책은 그 도전이 성공을 거둔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와 같은 도전은 비록 학문에서의 헤게모니에 그치지 않고, 현재 미국을 지배하고 있는 보수주의 정치의 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에는 진보진영에 대한 보수진영의 첫 번째 승리라고 할 수 있는 레이건혁명(Reagan revolution)을 가능하게 만든 (신자유주의적) 감세론자들의 기여가 자세히 그려져 있습니다.

시장만능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는 보수주의 경제학자들이 미국 사회 전반의 번영을 가져오는 데 한몫을 했다는 사실은 저자도 흔쾌하게 인정합니다.
그러나 효율만을 중시한 나머지 공평한 분배를 홀대한 결과 대다수 서민들을 번영의 대열에서 낙오하게 만들었다는 점은 큰 과오라고 지적합니다.
책의 끝 부분에서 저자는 그들의 공과를 이렇게 요약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장 경제는 가장 놀라운 인간의 발명품이다. 부를 낳는 강력한 기계다. 하지만 한 사회를 평가하는 척도는 피라미드 계층구조에서 가장 윗단에 속한 사람들의 삶의 질이 아니라 가장 아랫단에 속한 사람들의 삶의 질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의도적으로 번영의 분배를 외면해 왔다. 이 때문에 지금 자유민주주의가 선동을 일삼는 국수주의 정치가한테 그 생존을 시험당하고 있는 것이다."
The market economy remains one of humankind's most awesome inventions, a powerful machine for the creation of wealth. But the measure of a society is the quality of life at the bottom of the pyramid, not the top. The willful indifference to the distribution of prosperity over the last half century in an important reason the very survival of liberal democracy is now being tested by nationalist demagogues, as it was in the 1930s.


저자는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보수주의 경제학자들을 공정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오히려 애정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 본다는 느낌까지 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거둔 승리가 미국 사회에 양극화의 심화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남겼고 그 결과 민주주의 그 자체가 위협 받게 되었다는 냉정한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앞의 인용문에 나오는 '선동을 일삼는 국수주의 정치가'가 트럼프 부류의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을 뜻한다는 것은 모두 알아차리고 있겠지요?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극심한 양극화 상황을 교묘히 이용해 미국 사회를 더욱 극단적인 대립구도로 몰아감으로써 민주주의 그 자체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너무나도 설득력 있는 지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책을 새로 들쳐 보니 마침 제4장이 바로 눈에 띄더군요.
이 장의 제목이 "감세, 효과 없어도 감세"라는 것인데, 이 제목만 보고서도 그 내용을 대충 짐작할 수 있겠지요?
저자는 이 장에서 보수주의 경제학자의 핵심 의제인 감세정책이 아무런 긍정적 효과도 거두지 못하고 불평등의 심화만 가져왔다는 것을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게 되면 이 부분에 특히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책을 원서로 읽는 데는 상당한 부담이 뒤따릅니다.
이왕 번역본이 나왔다면 우리말로 읽는 쪽이 훨씬 더 편하다는 데 이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영어로 된 책을 많이 읽는 편인 나 역시 번역본 쪽이 더 편하다는 것을 절감할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재미있는 책의 번역본이 선을 보였으니 한번 꼭 읽어 보기를 권하고 싶군요.

ps. 번역본의 한 가지 문제점은 가끔씩 원문 대조를 하고 싶을 때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 책에서 자유주의자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영어의 'a liberal'을 그렇게 번역한 게 아닌가 짐작합니다.
그렇다면 '진보주의자'라고 번역하는 게 더 나을 텐데요.
보수주의와 대립구도를 이루고 있는 것은 자유주의가 아니라 진보주의일 테니까요.



이석기

2022/11/09

좋은책 추전 감사합니다. 방금 주문을 했습니다. 저가 1주일에 책 1권을 읽는 습관이 초등학교 때 부
터 습관이 되었습니다. 책 부류는 역사, 경제, 정치, 인문, 명상, 전체적으로 독서를 합니다.

김서원

2022/11/09

예전에 추천해주셨을때 구입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도 혼자 읽기 아까워서 주변에 추천해주고 싶었는데 번역본이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이 참에 하나 주문해서 다시 읽고 주변에 추천해서 함께 읽어보고 싶네요.

양종훈

2022/11/09

'선동을 일삼는 국수주의 정치가'

한국에선 보수세력들이 속칭 좌파세력을 표퓰리즈트로 매도할때 쓰는 말 같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