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해야 하겠습니다.
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변변한 논문 하나 써본 적이 없었습니다.
미국 대학원에 지원할 때 writing sample을 첨부하게 되어 있지만 기껏해야 대학신문에 기고한 글을 번역해 보내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그런데도 Princeton은 물론 Harvard에서도 합격 통지를 받은 건 엄청난 행운이었지요.

변명처럼 들릴지 몰라도 사실 그것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우리 세대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수준이었습니다.
대학생활 하면서 논문을 쓴다는 건 거의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으니까요.
더군다나 요즈음 우리 고등학생도 누워서 떡 먹듯 쉽게 하는 외국 저널에 논문을 게재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일이었구요.

그런데 2000년대 초 대학입시제도가 바뀌면서 갑자기 고등학교에서 논문을 쓰는 천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논문들이 외국 저널에 게재되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났구요.
이런 천재들이 성장해 우리 학계를 이끌어 간다면 머지 않아 우리 학문의 수준이 세계 최고의 수준에 오를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시작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 학계는 여전히 예전의 수준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논문을 척척 써내던 그 많은 천재들은 모두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 중에도 내가 몰라서 그렇지 그런 천재들이 상당히 많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서울대학교 들어오려면 여간 화려한 스펙을 쌓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그렇다면 서울대 재학생들 중에는 고등학교 시절 논문 쓰기를 밥 먹듯 하던 사람들이 꽤 많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단언컨대 내가 지금까지 가르쳐온 학생들 중 나의 학생시절 혹은 입시제도가 바뀌기 이전 세대의 학생들과 비교해 월등히 천재스럽다고 느낀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내가 배출한 제자들 중 세계 학계에서 이름을 날리는 사람이 꽤 있지만 그들은 거의 모두 이전 세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고등학교 때 논문 같은 것은 써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말이지요.
대학시절에도 그들이 논문을 써서 외국 저널에 실렸다는 건 들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논문 한 편 써낸 적이 없는 그들이었지만 지금은 세계적으로 인정 받는 학자로 성장했습니다.

꽤 오래 된 일이지만 어떤 학부모로부터 고등학생인 자기 자식이 '경제학원론'을 저술했으니 감수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일개 고등학생이 경제학원론 교과서를 저술했다니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는 일 아닙니까?
날고 긴다는 서울대 학생이 경제학원론을 공부하면서 제대로 이해가기 힘들어 애를 먹는 사례가 비일비재한 데 말입니다.

당연히 그 요청을 단번에 거부해 버렸지만, 우리의 잘못된 대학입시제도가 아이들을 망치고 있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더군요.
최근에는 이런 문제점들을 인식하고 대학입시에서 고등학교 시절 논문을 썼다는 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는군요.
그렇지만 2000년대 초 수시전형이라는 새로운 대학입시제도를 도입했을 때 그와 같은 부작용이 당연히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상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내 개인적 일을 말씀 드려 죄송하지만 새 입시제도 도입과정에 깊숙히 관여하고 있었는데, 나는 회의석상에서 늘 그와 같은 문제가 일어나리라는 점을 강력히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교수들은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그 결과 고등학생들이 논문을 썼다고 나서는 황당무계한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뒤늦게나마 논문 쓴 것을 스펙으로 인정하지 않는 쪽으로 방침이 바뀐 것에 대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고등학교에서 논문을 쓰는 천재가 전혀 나올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2006년 수학계의 노벨상이라고 할 수 있는 Fields medal을 수상한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천재 수학자 테렌스 타오(Terrence Tao)는 12세 때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금메달을 받았으며, 15살에 학문적 업적을 인정 받는 논문을 쓴 바 있습니다.
이런 천재라면 고등학교 시절 논문을 누워서 떡먹기 식으로 써낸다 해서 이상할 일이 하나도 없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고등학교 때 논문을 썼다는 친구들은 그런 천재가 아니고 부모들의 욕심으로 억지로 만들어진 가짜 천재가 아니겠습니까?
내가 늘 말하지만 그런 쓸모없는 짓에 매달리게 하지 말고 아예 운동장에 나가 공을 차게 만드는 것이 훨씬 더 교육적인 일이 아닐까요?
어린 학생이 스펙 쌓기의 정신적, 육체적 부담에 시달려 건전한 성장을 하지 못하는 사회의 미래는 결코 밝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허공에의질주

2022/05/06

당시 강남 학원가에서 논문 대필이 성행했습니다. 부모가 교수가 아니라면 대부분 대학원생들이 썼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이준구

2022/05/06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으리라고 봐요
뻔할 뻔자입니다
대필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정당한 범위를 넘는 조력을 받은 경우는 부지기수일 겁니다

이준구

2022/05/06

돈없고 빽없는 서민들은 그런 사기극에 참여할 엄두조차내지 못하겠지요
소위 사회지도층을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서 이런 일이 더욱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한심할 따름입니다

미누스

2022/05/06

경제학과 법학을 글자그대로 '통달'해야지 소략한 페이퍼 한장을 쓸 수 있는 '공정거래법'에 관한 논문을 고등학생(새정권 유력자의 영애라고 합니다)이 저술했다는 말을 듣고 실소를 흘렸습니다. 이런 글이 자기의 머리로 체득되어서 나온 거라고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을까요? 이런 사람을 천재라고 떠받드는 것은 진짜 천재에 대한 모욕입니다.

앱클론

2022/05/07

애그

2022/05/07

개인적으로 정말 궁금한 것은 그렇게 만들어진 스펙이 실제로 대학입시, 특히 아이비리그와 같은 외국의 유명한 대학에 진학하는데 도움이 되는건가요?

예를들어 고등학생이 두달간 논문을 5편을 쓰고 그 이후로는 논문을 쓴 활동이 없는 경우,(계속 있어도 마찬가지)
입학사정관이 5편의 논문을 썼다는 그 사실에만 집중하나요? 각각의 논문의 수준을 말할 것도 없거니와 5편의 논문이 나온 시기만 봐도 이건 대학입학을 위해 인위적으로 쌓은 스펙이고 심지어 (위법은 아니라도) 적절치 못한 방법까지 동원됐을 것으로 추정될텐데 이게 실제로 대학입학에 영향을 주나요? 제가 입학사정관이라면 바로 탈락시켜버릴꺼 같습니다. 그런데 저보다 더 전문가들인 강남의 입시컨설턴트들이 그렇게 컨설팅을 해준다는건 그게 통하니까 그렇게 해주는거 아닐까요? 정말로 이렇게 허접합니까? 대체 각 대학의 입학사정관들이 일을 그렇게나 대충하고 있다는 말인가요?

고등학생중에 간혹 천재가 나올 수 있고, 그런 학생은 논문을 퍼블리쉬해본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교수님들이 적절한 가이드를 해줘서 퍼블리쉬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제 기준으로 그런 경우는 그 논문이 학계에서 아주 인정되는 좋은 저널에 실렸을 경우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입학사정관이라면 실제로 그런 논문을 쓴 학생이 입학지원을 했다면 그 학생을 불러다가 면접을 볼 것 같습니다.(전공이 다를테니 해당 전공의 교수가 면접을 보는 것이겠죠.) 그 논문이 대필인지, 실질적 공헌없이 이름만 올렸는지 등등 단 몇분의 면접으로 바로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좋은 저널에 실린 경우에 한에서 말이죠.

누구처럼 에세이 수준을 정체를 알 수 없는 곳에 퍼블리쉬를 하면 일단 거들떠도 안보겠거니와 오히려 누가봐도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으로 그렇게 스펙을 만들었다는 것에 제가 입학사정관이라면 화가 날것 같고 바로 광속탈락을 시킬 것 같은데.... 실제로 그렇지 않는건가요? 그런 것들이 실제로 대학입시에 긍정적 영향을 주긴하는건가요?

이준구

2022/05/07

나도 과거 입시에 관여해 봤지만 그렇게 허위의 의혹이 간다고 해서 감점을 하기는 실상 매우 어렵네.
진정으로 능력이 출중해서 그런 스펙을 가졌는지를 분간해 내는 일이 무척 어렵기 때문이지.
그러니 돈 처발라 이런저런 스펙 쌓아놓는 게 결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네.
입학 컨설턴트들이 이 사실을 잘 알고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것이고,

넋두리

2022/05/07

입시를 위한 것, 대학 타이틀을 위한 공부였다는 것을 여실히 입증하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부모의 재력과 정보력에 기인한다는 것이고,,,,,문제는 나중에 이것이 격차사회를 심화시키는 발판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참,,,,,,소위 잘나간다는 사람들의 하는 짓이라곤 눈뜨고 봐주기 어려울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