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원론 베스트셀러의 저자로 유명한 맨큐(N. G. Maniw)는 미국의 대표적 보수파 경제학자 중 하나입니다.
부시행정부에서 대통령의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을 역임한 경력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지요.

요즘 내가 읽고 있는 “Combating Inequality”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목 그대로 점차 심화되는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 어떤 정책 처방을 사용해야 할 것인지가 이 책의 주제입니다.
20여 명의 저자가 10페이지 내외의 짧은 논문을 쓴 것을 모은 책인데, 이 책의 저자들 중에는 당연히 진보적 성향의 경제학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을 처음 열어 보았을 때 저자들 명단에 맨큐가 포함되어 있는 걸 보고 조금 생뚱맞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맨큐의 성향상 이런 책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책 중간에 등장하는 맨큐의 글을 읽고 내 첫 느낌이 과히 틀린 것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다른 저자들이 양극화를 해소하는 이런저런 방안을 내놓고 있는 와중에 그는 홀로 과연 그와 같은 재분배가 과연 필요한 것인지 자신은 잘 알지 못하겠다는 생뚱맞은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글에서 그가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열띤 토론의 대상이 되고 있는 기본소득제도(universal basic income)를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는 사실입니다.
이왕 재분배를 하려면 그 제도를 활용하는 게 훨씬 더 낫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기본소득제도는 진보진영의 대표적 어젠다로 인식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기본소득제도를 처음 제안한 사람은 보수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는 시카고 대학의 프리드먼(M. Friedman)입니다.
이 글에서 맨큐는 몇 십 년 전 자신이 학생이었을 때 이 아이디어가 등장하는 프리드먼의 “Capitalism and Freedom"이란 책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맨큐가 지적하고 있듯, 그 후 수많은 진보적 경제학자들이 이 제도의 지지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예컨대 1968년에 1천 명이 넘는 경제학자들이 이 제도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냈는데, 그 중에는 토빈(J. Tobin), 새무엘슨(P. Samuelson), 다이아몬드(P. Diamond) 같은 진보의 거성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겁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잘 말해 주듯, 현재에도 이 제도를 지지하는 경제학자들의 면면을 보면 보수와 진보를 모두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제도가 진보진영의 대표적 어젠다라고 보는 것은 현실과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보수파들은 왜 이 제도를 선호하고 있을까요?
그들은 이 제도가 행정적으로 단순하기 때문에 현재의 재분배정책과 관련된 낭비를 줄일 수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모든 국민에게 똑같은 금액을 지불함으로써 도움을 줄 대상을 선정하고 실제로 도움을 주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낭비를 피할 수 있다고 보는 거죠.

맨큐는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습니다.
재분배를 위한 정책으로서 다음과 같은 A와 B 두 가지가 있다고 가정하고 사람들이 어느 쪽을 더 선호하는지 살펴보자는 겁니다.

정책 A : 정말로 가난한 사람만을 골라내 보조금을 지급하는데, 스스로 번 소득이 0인 사람에게는 연간 1만 2천 달러를 지급한다. 스스로 번 돈이 1달러 늘어날 때마다 보조금을 0.2달러씩 줄여나간다.(따라서 스스로 번 연간 소득이 6만 달러가 되면 보조금의 지급이 중단된다.) 여기에 소요되는 예산은 연간 소득이 6만 달러를 초과하는 부분에 대해 20%의 세율로 부과한 조세수입으로 충당한다.

정책 B : 모든 사람에게 소득과 관련 없이 연간 1만 2천 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한다. 여기에 소요되는 예산은 모든 소득에 대해 20%의 세율로 부과한 조세수입으로 충당한다.

맨큐는 정책 A가 (가난한 사람만을 골라 보조금을 지급하는) 현행의 재분배정책과 매우 비슷한 한편, 정책 B는 기본소득제도와 비슷한 성격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따져 보면 이 두 제도가 아무런 실질적 차이를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각 개인별로 정부에서 받는 돈에서 정부에 내는 돈을 뺀 금액을 계산해 보면 그 사람의 소득이 어느 수준에 있든 똑같아지기 때문이란 것이지요.
예를 들어 베조스 같은 수퍼리치의 경우 B정책하에서 연간 1만 2천 달러의 보조금을 받지만 세금을 바로 그만큼 더 내기 때문에 A정책하에서의 경우와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됩니다.
그러니까 부유한 사람이라 해서 B정책이 하등 더 유리할 바가 없다는 말이지요.

맨큐는 많은 사람들이 A와 B가 실질적으로 똑같은 내용의 정책이라는 점을 잘 모른 채 기본소득제도를 반대한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두 정책이 실질적으로 똑같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한다면 행정적으로 훨씬 단순한 정책 B를 더욱 선호할 게 분명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맨큐는 자신이 가르치는 하버드 대학의 학부생을 대상으로 이 두 정책의 선호도를 비교하는 실험을 실시해 보았답니다.
그 결과 90%에 이르는 학부생이 (현재의 재분배정책에 해당하는) 정책 A가 더 좋다는 답변을 제시했다고 합니다.
수퍼리치에게도 똑같은 금액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은 미친 짓 아니냐는 말을 하는 학생도 있었다고 하네요.

물론 어떤 상황에서나 현행의 재분배정책과 기본소득제도가 똑같은 내용의 정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맨큐가 만들어낸 특수한 상황에서만 양자가 똑같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분명한 사실은 모든 국민에게 똑같은 금액의 보조금을 지급한다 해서 수퍼리치에게까지도 혜택을 주는 우스꽝스러운 정책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코로나 사태로 인한 재난지원금을 지급할 때도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느냐 아니면 선별적으로 지급하느냐를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맨큐의 논리에 따르면 그 두 가지 방식 사이의 차이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부자의 경우 지원금 받는 만큼 (그것의 재원으로 사용될) 세금의 부담이 더 커질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전 국민에게 지급하는 방식은 말도 안 되는 진보진영의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보수의 아이콘인 맨큐는 선별적 지원을 하는 것보다 오히려 전 국민에게 일률적으로 지급하는 방식이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나는 맨큐를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이 점과 관련한 그의 논리는 반박하기 힘들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Wooney

2021/06/07

저는 일단 기본소득제가 재정에 큰 부담을 줄까 염려가 되어 그동안 우호적이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맨큐의 논리처럼 이미 근로소득이 있는 자에게 기본소득제 실시 전후가 실질적으로 최대한 비슷하게끔 기본소득제를 설계한다면, 기존의 근로의욕 감퇴와 막대한 재정부담이 크게 설득력 있는 지적이 되진 못할 것 같습니다. 다만 이를 기반으로 기본소득제를 실시한다고 할 때, 사회 전반에 동의를 구하기까지 많은 설득의 노력과 행정체계 수정에 따른 비용(사회구성원의 혼란 등)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기본소득제 자체에 거부감이 있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서요.

맨큐의 논리를 부정하기 힘든 것에 저도 동의합니다. 사실 이런 주장을 했다는 것조차 학계에 종사해본 사람이 아니라면 솔직히 접하기가 힘든게 현실이지 않습니까? 저도 이런 논의는 교수님의 글에 의존하곤 합니다. 결국 기본소득제에 대한 본인의 입장을 정하기 전에, 이처럼 학계에서의 수준 높은 논의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려주는 것이 가장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것이 지식인으로서의 책무라고 생각하구요.

Cer.

2021/06/07

아마 맨큐가 말한 것과 비슷한 정도의 효과를 보려면 세율이 지금보다 훨씬 높아야 할 거 같은데요.. 그런데 프리드먼이 NIT 말고 기본소득도 주장했다는 건 조금 놀랍네요.

Wooney

2021/06/07

세율 자체가 어떤 정도인지는 기본소득제 실시 전의 세후 소득과 결국 비슷하게 된다면,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높은 세율 자체가 겉보기에 엄청 부담스러워 보이는건 사실이긴 하죠..

앱클론

2021/06/07

교수님 글 잘 읽었습니다.
근데 시카고 대학은 전형적인 진보대학 아닌가요? 밀턴 프리드먼도 자유 진보주의 경제학자로 알고 있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었나 봅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나서도 기본소득제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입니다. 만약 부자들에게 1만2천 달러를 주고 20%를 과세한다면 그들은 세금을 더 내는 셈이니 당연히 반대할 게 뻔합니다.

그리고 장기간 실업상태에 빠지게 된다면 전 국민에게 1만2천 달러를 지급할 재원을 어디서 구해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세후 100만원~120만원 정도 받는다면 굳이 일을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또한, 소득세 20%를 제외하고 각종 사회보험료를 근로소득에서 뺀다면 실질소득이 기본소득금과 비슷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차라리 일을 하지 않고 교육을 받는 게 낫다고 믿습니다.

게다가 기본소득금 부여 대상을 어떻게 선정해야 할지 의문입니다. 모든 사람이라 함은 한 살짜리 아기에게도 지급되는 것인지, 아니면 노동력을 공급할 수 있는 나이대부터 지급할 것인지 말이죠.

물론 기본소득제가 공론화되어 앞으로 체계적이고 섬세하게 논의되겠지만 현재로썬 거부감이 강하게 듭니다. 갈수록 줄어드는 노동가능인구와 초고령화 사회 진입이 코 앞에 있는 상황에서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것은 현실과 괴리감이 있다고 봅니다.

그래도 이 글을 통해 기본소득제에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양종훈

2021/06/08

재난지원금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도 많아요. 특히 보수진영에선 퍼주기 말고 감세를 하랍니다.

이준구

2021/06/08

Capitalism and Freedom이란 책에서 프리드만이 제의한 것이 NIT인 건 맞습니다.
그런데 맨큐는 기본소득제도 역시 이 NIT의 한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KMOOC땡큐

2021/06/12

“나라가 만들어진 후 두 번의 경제위기를 거쳐 박근혜 정부까지 쌓은 빚을 모두 통틀어도 660조인데, 문재인 정부에서 늘린 빚만 자그마치 410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