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원론의 공저자인 이창용 박사는 요즈음 아시아개발은행의 Chief Economist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마닐라에 있을 때 꼭 한 번 놀러 오라고 하길래 이번 겨울방학을 이용해 가보기로 결심했습니다.
마닐라만 가기는 뭐해 보라카이라는 휴양지도 들려 보기로 했지요.

그런데 비행기 예약이 보통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마닐라에서 보라카이 가는 비행기는 국내선을 이용해야 할 것 같아 필리핀항공 인터넷에서 예약을 하려 했는데 영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국제노선을 뛰는 항공사니만큼 인터넷 예약 정도는 쉬울 거로 예상했는데, 실상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위대함을 새삼 깨닫게 되었지요.)

그래서 필리핀행은 아예 포기해 버리고 다른 동남아 행선지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안 간다고 했더니 껄껄 웃더니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아시아개발은행의 인터넷도 종종 꺼진다고 하더군요.

마침 내 동료교수가 얼마 전 갔다 왔다는 코타 키나발루가 내 관심을 끌었습니다.
지명이 길어 외우기가 힘들어 몇 번씩 되물었던 곳이라 더욱 기억에 남았거든요.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그럴 듯했습니다.
말레이지아는 비교적 부유한 나라니까 치안도 좋을 것 같았구요.

그곳에 가보니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매우 깨끗하고 정비가 잘된 관광지였습니다.
그때 서울은 영하 15도를 넘나든다는데 거긴 30도 내외의 더운 날씨였구요.
추위를 잘 피해 도망왔구나라는 생각이 들데요.
극심한 추위에 떨고 있었을 여러분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요.

떠날 때는 잘 모르고 있었는데, 코타 키나발루가 말레이반도에 있는 게 아니라 보르네오 섬에 있더군요.
중학교 지리 시간에 보르네오 하면 열대우림이 우거진 습한 곳으로 배웠고, 고등학교 때는 향신료의 주산지로 영국과 네덜란드가 각축했던 곳이라고 배웠지요.
살다 보니까 내가 보르네오 섬까지 오게 되었구나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하더군요.

거기도 기후변화가 찾아왔더군요.
인터넷 보니까 2월이 우기의 끝자락이라 하기에 우산을 준비해 떠났습니다.
사람들 말로는 매일 스퀄이 한 차례 휩쓸고 간다고도 했구요.

그런데 첫 두 날은 청명하기 이를 데 없는 날씨였습니다.
가이드 말로 기후변화 때문에 우기가 없어져 가고 있다데요.
기후변화 때문에 온 지구가 난리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덕분에 비치에서 멋진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요.

코타 키나발루의 비치들은 정말로 고운 모래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고운 모래가 깔린 백사장이 끝없이 펼쳐지는데도 막상 그곳을 찾은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관광객 몇 사람만 한가로이 노닐 뿐이었습니다.
이런 곳이 한국에 있었다면 얼마나 많은 비치파라솔과 사람들로 붐빌지 상상해 보니 쓴웃음이 나더군요.
하여튼 그 한적한 비치에서 해먹에 누워 시원한 바람 맞으며 뒹굴뒹굴하던 시간은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 될 것 같습니다.

그 백사장에서는 두 번째 사진에서 보는 것 같은 무늬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아주 작은 게가 보일 겁니다.
그 녀석이 구멍을 뚫어 집을 만들고 먹이 활동을 한 결과 만든 기하학적 무늬지요.
모래를 입에 잔뜩 집어넣어 미생물을 섭취한 다음 내뱉은 모래가 작은 콩알 모양의 덩어리가 되는 거지요.

그런데 이 작은 놈들이 무척 빠릅니다.
백사장을 달리는 모습을 보면 스포츠카가 저리가라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내 지략을 당하지 못해 한 놈이 생포되어 자세한 관찰의 대상이 되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물론 관찰 후 건강하게 모래사장으로 돌려 보냈지요.
공연한 살상은 죄악이니까요.

세 번째 사진은 이번 여행에서 제일 맛있게 먹은 칠리크랩이라는 요리입니다.
이런 걸 염장샷이라고 부르나요?
네 번째 사진은 함께 마신 코코넛인데 사람 머리통만큼 크더군요.
하와이에서 먹던 것보다 훨씬 크고 모양도 조금 달랐습니다.
코코넛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걸 실감했지요.

이번에는 더러운 곳 얘기를 한 번 하기로 하겠습니다.
먹는 것 얘기하다 갑자기 더러운 곳 얘기 하는 게 뭐하기는 하지만 이 얘기는 꼭 해야 하겠습니다.
그만큼 인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첫 날 호텔 방에 들어가서 둘러보니 이상한 광경히 목격되었습니다.
화장실 변기 옆에 작은 샤워가 비치되어 있는 것입니다.
목욕하는 샤워는 따로 있는데 변기 옆에도 샤워꼭지가 하나 더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무심코 지나쳤는데 다음에 보니 거의 모든 화장실이 그렇게 되어 있더군요.

그리고 공중 화장실 들어가 보면 늘 바닥이 물로 흥건히 젖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변좌까지도 물로 젖어 있었구요.
또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조금 깨끗하다 싶은 빌딩의 화장실에도 화장지는 없었습니다.
다섯 번째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사정을 재충 짐작하실 겁니다.

가이드에게 물어 봤더니 비데하는 샤워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옷을 다 입은 상태에서 일을 보고 그 샤워꼭지를 어디로 향하고 비데를 한다는 말인가?
옷이 다 젖어버릴 게 아니겠습니까?

호기심이 뻗친 나는 말레이지아에서 오래 살았다는 일행 중 한 사람을 잡고 또 질문공세를 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도 시원한 대답은 하지 못하더군요.
말레이지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수건 같은 걸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그걸로 처리를 한다는 애매한 대답밖에 없었습니다.

하기야 정확한 대답을 해주려면 현지인과 함께 변소 안에 들어가 관찰을 했어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한 일이지요.
인도에서는 큰일을 본 후 왼손으로 처리하고 물로 씻는다는 말을 듣기는 했는데, 말레이지아도 똑같은 방법으로 처리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샤워꼭지는 처리한 손을 씻는 데 쓸 것이구요.
이것이 내 짐작인데 잘 알고 계신 분 있나요?

우리도 화장실 문화가 짧은 시간에 크게 바뀌었습니다.
예전 농촌에서는 변소에 짚을 준비해 놓고 그걸로 닦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제주도 민속마을에 가니까 화장실 옆에는 꼭 동백나무를 심고 그것의 잎으로 처리했다는 얘기를 하더군요.
동백나무 잎으로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여태 풀리지 않는 의문이지만요.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웬만한 부자 아니면 화장지를 쓰지 못했습니다.
신문지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실에 꿰어 놓고 그걸로 처리를 하곤 했지요.
그런데 요즈음 우리나라 화장실은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깨끗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렇게 큰 일을 본 후 손으로 처리하는 문화에서 식사를 할 때 손을 쓰는 경우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내 생각으로는 철저하게 손을 쓰지 않으려 할 것 같은데요.
시간이 흐르고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그런 문화도 차츰 바뀌리라고 봅니다.
글로벌화하면서 바뀌어야 한다는 압력을 받게 되기도 할 것이구요.

그런데 아직까지는 그런 문화가 끈질기게 버티고 있군요.
말레이지아라면 동남아시아에서는 꽤 잘 사는 나라이고 관광객도 많이 찾는 나라인데요.
하여튼 이번 여행에서 제일 인상 깊게 남은 부분이 바로 그 화장실 문화였습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배탈이 나지 않아 밖에 나가 돌아다닐 때 큰일을 보지 않아도 되었다는 점입니다.
만약 저번 후쿠오카 갔을 때처럼 배탈이라도 났다면 정말이지 큰일날 뻔 했습니다.
플러시도 잘 되지 않고 화장지도 없는 곳에서 큰일을 본다고 상상을 해보세요.
Oh my God!
생각만 해도 등에 진땀이 흐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