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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22 15:36    조회수 : 6334    추천수 : 37
 글쓴이   이준구
 파일   첨부파일없음
 제목   '건전재정'이라는 이름의 도그마(dogma)


가정이나 국가가 모두 똑같지만, 수입과 지출이 균형을 이루는 건전재정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데 한 점 이의가 없습니다.
수입은 빠듯한데 빚내서 마구잡이로 씀씀이를 늘리는 가정은 파산의 구덩이에 빠지고 맙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여서 지출을 적절히 통제하지 않고 재정적자를 쌓아가다가는 곧 국가부도의 위험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경제가 어떤 상황에 있든 건전재정 유지가 절대적으로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경직된 사고입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일시적으로 건전재정을 포기하고 과감하게 적자재정을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1930년대의 대공황하에서 케인즈(J.M.Keynes)가 제시한 ‘기능적 재정’(
functional finance)이라는 새로운 개념입니다.
대공황의 덫에서 빠져나오려면 정부지출의 과감한 증가를 통해 수요 부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그렇다면 적자재정도 불사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 것입니다.

그 이후 재정정책은 통화정책과 더불어 경제안정을 위해 활용될 수 있는 정책수단으로 널리 인정되어 왔습니다.
재정정책은 조세 징수액을 줄이거나 아니면 정부지출을 늘려 총수요 부족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주로 운영됩니다.
이 과정에서 재정적자가 발생하면 국채 발행을 통해 이를 메우게 되지요.

물론 재정적자가 계속 발생해 국채가 남발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국채 발행액이 커지다 보면 국가의 채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심각한 위기상황을 초래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건전재정의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건전재정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과감한 재정확장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에서도 머뭇거리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아닙니다.
설사 적자재정으로 인해 국가의 채무가 어느 정도 더 커지더라도 때로는 과감하게 이를 실천에 옮겨야 할 때가 있는 법입니다.
정부가 재정적자를 겁내 손을 놓고 있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불황으로 인한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이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경제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확장적 재정정책 하나만으로 풀어낼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좀 더 근본적인 해법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구태여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해법을 마련하고 이것이 효과를 거두려면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따라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근본적 해법은 그것대로 추구하되, 과감한 재정확장을 통해 단기적으로 불황에서 발생하는 고통을 줄여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보수야당과 보수언론은 재정건전성을 들먹거리면서 재정확장을 추구하는 정부의 발목을 잡기 일쑤입니다.
마치 재정건전성의 유지가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는 지상과제나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나는 그들이 건전재정이란 도그마에 빠져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이렇게 해석하고 싶지는 않지만, 무슨 수를 써서든 정부를 궁지에 빠뜨리고 싶어 하는 놀부 심보가 작용하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경제가 어려울수록 정부를 궁지에 몰아넣고 몰매를 때리기가 그만큼 쉬워질 테니까요.

그 동안의 경험에서 드러났듯, 통화정책을 통해 불황에서 벗어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자율이 거의 0% 수준으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낮출 여지도 작은 데다가, 이자율 인하가 소비나 투자에 이렇다 할 긍정적 효과를 냈다는 증거를 찾아보기도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주요국들 모두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크루그먼(P. Krugman)이나 스티글리츠(J. Stiglitz) 같은 경제학자들이 과감한 확장적 재정정책의 채택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IMF 같은 국제기관에서도 과감한 재정확장을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전통적으로 IMF는 재정건전성을 매우 중시하는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이런 충고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듯, 우리나라의 국가채무 수준은 OECD 여러 나라들 중 가장 낮은 수준에 속합니다.
미국은 우리보다 두 배 이상 높고, 일본은 다섯 배 이상 높은 실정입니다.
그런데도 미국과 일본 정부는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서슴지 않고 공격적인 확장재정을 추구합니다.

최근 국제신용평가기관 S&P는 우리나라 국가신용등급을 아주 높은 수준인 AA 등급에 계속 유지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보다 등급이 더 높은 나라는 불과 15개국에 불과합니다.
국가채무에 관한 한 아직 안전지대에 머물고 있다는 평가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런 우리가 벌써부터 겁을 집어먹고 머뭇거릴 필요가 있을까요?

내가 보기에는 경제학자들 중에도 건전재정 도그마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건전재정을 강조해서 손해 볼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건전재정을 강조함으로써 책임감 있고 사려 깊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을지언정, 무책임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줄 리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나처럼 필요하면 과감하게 적자재정의 길로 나아가라고 외치는 사람이 무책임하게 비춰질 가능성이 크지요.
“이 친구가 나라를 말아 먹으려고 아예 결심을 했구나.”라는 식의 비난이 쏟아지기 일쑤일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확장재정을 통해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재정적자 발생 여부와 관계없이 당연히 그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것이 진정으로 용기 있는 태도라고 믿습니다.

Economist지는 세계 제1차 대전 직후 영국의 건전재정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경제를 엉망으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지적합니다.
대전 직후 영국의 국가채무는 GDP의 140% 수준까지 뛰어 올랐고, 그 결과 국가신용도가 땅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영국 정부는 뼈아픈 재정긴축을 단행해 1920년대에는 상당폭의 재정흑자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긴축적 재정정책의 결과는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긴축정책은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와 1928년의 GDP는 10년 전인 1918년의 GDP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10년 동안 줄곧 성장이 뒷걸음질 쳤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긴축적 재정정책이 영국의 국가부채를 줄이기는 했을까요?
아닙니다. 1930년의 국가부채 규모는 오히려 GDP의 170% 수준으로 뛰어올랐습니다.
경제가 위축되니 자연히 조세수입이 줄어들고 정부가 아무리 긴축을 하려 해도 재정적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국채의 발행은 미래 세대의 (조세)부담을 늘린다는 점에서 무책임한 일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약 국채 발행을 통한 정부의 추가적 수입이 모두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의 소비를 늘려주는 목적으로만 지출된다면 그 지적이 맞습니다.
그러나 국채 발행을 통한 추가적 정부지출이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미래의 세대도 더 높은 소득을 얻을 수 있다면 미래세대로 부담이 전가된다는 논리는 타당성을 갖지 못합니다.

미래세대의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건전재정이란 도그마에 빠져 불황에 빠진 경제를 그대로 방치해둔 앞 세대의 무책임함이 더욱 원망스러울 것입니다.
지속되는 불황국면이 미래세대에도 상당한 고통을 주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불황국면에서 빠져나와 순조로운 성장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미래세대를 위한 최선의 방책입니다.

물론 정부가 빚내서 이런저런 데 부질없이 흥청망정 써버린다면 그건 큰일입니다.
따라서 정부가 한 푼이라도 낭비적 지출을 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해야 마땅한 일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정부 재정에 적자가 나느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정부가 생산적인 방식으로 적자재정을 활용했는지의 여부가 바로 문제의 핵심입니다.

그런데도 건전재정의 도그마에 빠진 사람들은 적자재정 그 자체가 마치 무책임한 재정운영의 전형이라도 되는 듯 매도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교조주의적 태도는 지금 우리 경제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김서원
(2020/04/22 18:00)

사실 미국 경제만 살펴봐도 사회안전망 구축에 들어가는 비용은 다 깍아내면서도, 다른 나라 쳐들어가서 전쟁한다고 그보다 훨씬 많은 돈을 투자하더라고요. 진짜 재정 건전성을 해친 건 전쟁이 아닐까 합니다. 그와중에 재정 건전성을 부르짖으며 전쟁을 반대한 미국의 신자유주의자가 없다는게 그 쪽의 위선적 면모를 보여주는게 아닌가 합니다.

 
김서원
(2020/04/22 18:01)

우리나라도 과연 사회안전망 구축때문에 정부빚이 늘어났는지 아니면, 정권의 무리한 사업들, 대기업의 퍼주기 때문인지 꼼꼼히 따져보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적으로 4대강 사업이 한창 진행될때 재정건전성을 울부짖던 경제학자는 못본거 같거든요.

 
beatrice
(2020/04/22 19:23)

제가 있는 곳에서도 사회안전망에 쓰여야 할 예산들이 계속 줄어왔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사르코지 대통령이 <블링블링 대통령>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으니 오래전부터 진행된 경향인 것 같습니다. (마크롱은 '부잣집 도련님', '꼬꼬마'대통령이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이번에 프랑스 사태를 보며 경악스러운 사실을 발견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공공 서비스 (병원, 학교 등) 예산을 줄여와서 이전부터 의사, 교사들이 시위하며 문제제기를 했을 정도 였는데 이번 코로나 사태와 겹쳐 그들뿐만 아니라 시민들까지도 모두 화가 난 상태입니다.

왜 공공서비스 예산을 줄였는지 알아보니 그 이유 중 하나가 국방비에 더 많은 예산을 들였기 때문이랍니다. 참...할말이 없어졌습니다.

 
이준구
(2020/04/23 09:51)

김서원씨 말이 맞아요
지금 입만 열면 재정건전성 부르짖는 사람들 그때 단 한마디도 안했어요
더구다나 MB는 재정적자 숨기려고 수자원공사쪽으로 적자 밀어넣는 꼼수까지 부렸는데도 그걸 모두 못본 체 한마디도 안 했답니다
한마디로 내로남불의 전형적 사례지요

 
Cer.
(2020/04/23 12:10)

저도 총수요확장정책을 등한시 하는 사고 방식은 너무 경직적 마인드라는 교수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도 과거 당대표 시절에 40%를 재정건전성의 마지노선 비율이라고 언급하면서 박근혜 정부를 비판하다 작년에 40% 못 넘길 이유가 없다며 확장 재정을 주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이 정부의 확장 재정정책을 의심하는 것도 어느정도 이해는 갑니다. 정책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정부의 신뢰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거랑은 약간 다른 차원에서 남북통일 등 북한의 급변 사태라는 변수가 있어서 함부로 확장 재정정책을 사용해선 안 된다는 주장도 있긴 하더군요.

 
econ2019
(2020/04/23 16:45)

beatrice님, 프랑스는 OECD 모든 국가 중에 공공복지에 지나치게 과할 정도로 많은 돈을 쓰는 나라입니다.(GDP 대비 사회복지지출이 1/3로, OECD 중 압도적 1위입니다. OECD 평균은 20정도)

많은 나라들이 프랑스의 복지비중은 과하므로 감축해야한다는 입장이고(+우리는 그렇게 가면 안된다), 지속가능하지 않은 지출에 손을 대는 개혁은 사실 맞는 방향이죠. 복지를 줄이자는 주장을 누가 달가워하겠습니까만... 훗날 역사가 평가하리라 봅니다. 2010년대의 프랑스가 괜히 유럽의 병자라고 비판받았던 것이 아니죠.

 
beatrice
(2020/04/23 18:49)

econ2019님/ 구체적인 정보 감사합니다. 제가 일상 생활을 할 때는 이곳의 공공 복지제도가 잘 되어 있다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또 이번 팬더믹 사태 이후 외국인인 저에게도 긴급 지원금 혜택 및 관련 조치들이 신속히 취해지는 것을 보며 놀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팬더믹 사태로 드러난 몇몇 사실들은 이 곳이 복지국가가 맞나? 의심 될 정도로 경악스러운 부분도 있습니다. 특히, 이곳의 의료 인프라가 굉장히 열악한 상황입니다. 의료 후진국도 아닌데 시설이 갖춰지지 않았다는게 참 놀랍습니다. 그 예가 인구수대비(10만명당) 병상수와 (이번 팬더믹에 절대적으로 필요한)호흡기수가 주변 유럽국보다도 또 미국, 한국보다도 훨씬 적은 상황입니다.

econ2019님께서 언급하신대로 공공복지 지출이 이전에는 너무 과했고, 이에 따라 복지 예산을 줄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필요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복지 비중을 감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경우를보니 그 감축 대상이 국민의 삶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분야가 되면 안 되겠다는 것을 많이 느끼는 요즘입니다. 또, 이를 위해서는 지속가능하지 않은 지출이라도 부족한 것 보다, 과한 쪽으로 가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번에 한국이 방역에 좋은 성과를 냈습니다. 프랑스 사태를 보면서 한국이 방역성과만큼 후조치도 신속하고 넉넉하게, 그리고 과하다 싶더라도 적극적인 지원으로 어려운 시기를 극복 할 수 있는 환경이 잘 갖추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준구
(2020/04/23 20:52)

beatrice양이 현지에서 직접 경험했으니 그 사정을 제일 잘 알고 있겠지.
이런 대규모 전염병 발생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공공의료에 대한 투자가 낭비적으로 비춰졌을거야.
그러니 신나서 그 예산을 삭감했겠지.

 
양종훈
(2020/04/23 21:28)

제일 큰 문제는 정부가 확장재정을 펴서 경제가 살아날거라고 국민들이 믿어줄까 하는 점입니다. 일자리예산 54조를 썼는데 고용을 고작 5천명 늘리지 못했다고 비판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83눈팅
(2020/04/28 11:15)

재정확대 반대논리의 핵심이 미래세대에게 부담을 지운다는 것이었는데, 교수님의 글을 읽고나니 오히려 미래세대를 위해서는 필요할 때 과감한 재정확장정책을 펴는 것이 맞다는 확실한 논거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명쾌한 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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