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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9 11:01    조회수 : 1897    추천수 : 20
 글쓴이   이준구
 파일   첨부파일없음
 제목   글씨 교정학원에 다니는 사람이 늘어난다네요


내가 초등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글씨를 꽤 예쁘게 썼나 봅니다.
선생님이 글씨 예쁘게 쓰는 학생 몇을 골라 그들의 공책을 시범적으로 학생들에게 보여 줬습니다.
나는 늘 그 중 한 사람으로 뽑혔답니다.

그러다가 3학년쯤 되어 갑자기 악필로 변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악필로 변해 버렸는지 아직도 그 이유를 잘 모릅니다.
자연히 부모님의 꾸중을 많이 듣게 되고 나로서는 그게 큰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4학년 때는 마음 먹고 정자로 쓰는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유려한 필체는 이루어지지 못할 꿈임을 자각하고 그저 혼나지만 않을 정도의 정자체나 익히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후 내 필체는 그것으로 고정되었고, 그래서 아직도 글씨에는 자신이 없습니다.

대학생 때 친구들과 함께 단체로 한일관이란 음식점에 갔습니다.
각자 시키는 음식이 다양해서 한 사람이 정리해 주문을 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내가 대표로 각자 원하는 음식을 취합해 메모로 만들어 식당 아줌마에게 건네 줬습니다.

그런데 그 메모를 들여다 본 아줌마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우더니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공부 잘하는 것하고 글씨 잘 쓰는 건 다른가 봐요."
당시에는 대학 배지를 달고 나녔던 때였으니까 그 분은 내가 서울대생인지 알고 있었던 거지요.
그분 말씀의 요지는 내 글씨가 형편 없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최근에는 군 복무 중인 제자 한 명이 장교에게 내 책을 선물하고 싶다며 책 한 권 달라고 하더군요.
그리곤 내 사인까지 요청했습니다.
내가 사인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 친구가 "선생님 글씨는 별로네요."라는 말을 던지더군요.

사인한 책을 공짜로 받아가는 주제에 그런 입바른 소리를 하다니요!
농담이지만 그게 서울대생의 평균적 사회성이라고 생각합니다.
하하하.

하여튼 나 자신도 글씨라면 그다지 자신감을 갖지 못하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 같은 개발새발은 절대 아니고,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정자체로 쓴다는 데 자부심을 갖고 삽니다.
글씨란 정확하게 의사전달의 기능만 수행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문제는 남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악필입니다.
교수로서 그 동안 채점을 하면서 그런 악필을 수없이 많이 봤습니다.
정말이지 어떤 시험지는 도대체 짜증이 나서 채점하기가 싫을 정도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여러분이 무척 궁금해 하는 점이 하나 있을 겁니다.
내가 채점할 때 그런 악필을 어떻게 대접했느냐라는 의문일 테지요.
좀 더 근본적으로 글씨 잘 쓰고 못 쓰는 게 채점과정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궁금할 겁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글씨 예쁘게 써서 손해 볼 건 하나도 없습니다.
나뿐 아니라 내 동료 교수들도 공통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예쁜 글씨로 쓴 답을 가혹하게 채점할 이유가 하나도 없으니까요.

문제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악필이 감점 대상인지에 있지요.
내 양심을 걸고 말하지만 악필이라 해서 의도적으로 감점을 한 적은 없습니다.
아무리 읽기 어렵다 하더라도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판독을 하려 애썼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예쁜 글씨를 봤을 때의 좋은 기분과 악필을 봤을 때의 나쁜 기분이 무의식적으로 점수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은 배제하기 어렵습니다.
교수도 인간인지라 그런 정도의 기분에 좌우되는 건 어찌 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인이면 모르겠지만요.

내 제자들 중 악필로 인해 고시에서 어려움을 겪었다는 경험을 얘기하는 친구가 많습니다.
난 그게 사실일 거라고 믿습니다.
어떤 친구는 악필 교정이 힘들어서 왼손으로 글씨 쓰는 연습해 고시를 쳤더니 바로 합격되었다는 일화도 있구요.

요즈음 글씨 교정학원이 성업을 이루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겠지요.
학원비는 시간당 2만~3만원이라는데, 거길 다니는 사람 말 들어보면 그 돈의 가치가 있다 하네요.
백만원 정도의 비용을 들여 고시나 취업 시험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면 괜찮은 투자라는 게 맞는 말일겁니다.

여러분들 글씨에 대해 컴플렉스를 갖고 있다면 나처럼 정자체로 쓰는 연습 해보세요.
비록 달필은 되지 못할지언정 시험에서 페널티를 받는 비극은 능히 피할 수 있을 테니까요.

 

Cer.
(2019/08/19 18:36)

ㄷㄷ 오히려 의도적으로 악필 쓰는 경우도 있다고 하던데요. 사법시험같이 매겨야할 시험지가 산더미같은 교수 입장에선 서술형 답안에서 글씨 대충 쓰면 그냥 넘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악필 전부 감정하기에는 시간이 없으니 핵심 단어가 있는지 없는지만 체크한다는 소문이 있어서 핵심 단어만 알아볼 수 있게 쓰고 나머지는 시간 없으니 휘갈겨쓰면 비문을 써도 교수가 잘 못알아본다는 식으로요. 오히려 정자체로 쓰면 비문이 더 눈에 띄니 불리하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준구
(2019/08/19 19:35)

내 생각에 그건 아주 위험한 전략이예요.
채점관마다 다르겠지만 악필인 답은 그냥 오답처리하고 넘어가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을 겁니다.

글씨가 아주 깨끗한데 완전 오답을 쓰는 경우 눈에 확 뜨이기는 하죠.
그런데 이 경우 동정 점수 주는 사람이 많아요.

 
동훈학생..
(2019/08/20 20:49)

저는 오히려 교수님께서 동영상 강의에서 판서 하실때 쓰시던 정자체가 보기 편했습니다.

 
fred
(2019/08/20 21:49)

교수님 죄송합니다. 여기를 떠나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늘 건강하시구요 ^^

 
이준구
(2019/08/20 22:13)

fred씨 무슨 말씀이신가요?
무슨 사연이 있나요?

 
이준구
(2019/08/20 22:14)

정자체로 쓰면 알아 보기는 쉽지.

 
Cer.
(2019/08/20 23:04)

단순히 정자체로 쓰는 것보다 빠른 시간 내에 정자체로 쓸 수 있게 하는 강의면 꽤 쓸만할 것 같습니다. 사실 악필인 사람들도 정자체로 맘먹고 쓰려면 쓸 순 있겠지만 문제는 고시 같이 제한된 시간내에서 글을 쓸때 아닐까요? 쓸 게 엄청 많은 시험지에 또박또박 정자체로 쓰기란 심리적으로 부담도 될테니까요.

 
윗글 바로 이런 걸 가리켜 "악마의 편집"이라고 하는 게 아닐까요?
아랫글 기초 경제학 공부를 고교 필수과정에 넣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