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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9 11:41    조회수 : 778    추천수 : 18
 글쓴이   이준구
 파일   첨부파일없음
 제목   교통지옥(traffic jam)의 심리학


이번 추석연휴에도 사람들의 귀성길이 무척 힘들었나 봅니다.
지방이 고향인 사람은 매년 추석과 설 두 번에 걸쳐 주차장으로 변해 버린 고속도로 위에서 온갖 고통을 견뎌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고생을 한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것이 내가 상상하는 것만큼 끔찍한 경험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고향에 가기 위해 열 시간 넘게 차를 몰았다고 말하면서도 표정은 그리 나쁘지 않은 경우를 많이 봤으니까요.
정말로 그것이 끔찍한 경험이었다면 자못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런 말을 했을 텐데요.

모처럼 고향에 돌아가 부모님도 뵙고 서울생활에서 쌓인 스트레스도 풀 수 있어 기분이 좋아졌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그렇지만 열 시간도 넘게 교통지옥에 갇혀 고생한 데서 오는 심적인 트라우마가 그리 쉽게 가실 수 있을까요?
열 시간을 꼼짝하지 않고 계속 소파에 앉아 TV를 보라고 해도 무척 지겨운 일일 텐데요.

명절 때 고향길 가는 방법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행태를 봐도 교통지옥을 그리 고통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만약 교통지옥을 아주 고통스럽게 느낀다면 그것을 피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할 것이 분명합니다.
다시는 꽉 막힌 도로 위에서 고통을 겪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하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 미리 미리 예약을 해서 비행기, 철도, 버스 등의 대체수단을 이용할 수 있을 겁니다.
자동차로만 가야 할 사정이 있는 경우라도 체증이 가장 심한 시간대를 피해서 갈 수도 있는 일이구요,
그런데도 하필이면 가장 체증이 심한 시간대에 자동차를 몰고 귀성길에 오르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이를 보면 막상 교통체증을 겪은 사람들이 느끼는 스트레스는 제3자가 짐작하는 것과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다시 말해 제3자가 짐작하듯 끔찍한 경험으로 인식하지는 않을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지난 몇 년 간 계속 고생을 했으면서도 올해에도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요?

최근 The Economist지에 교통지옥에 관한 기사가 올라왔는데, 이걸 읽고서 내 의문이 어느 정도 풀렸습니다.
이 기사가 인용하고 있는 분석결과를 보면, 사람들은 당연히 교통체증에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한 연구자는 주유소에 들어온 차들의 운전자들을 대상으로 혈압을 체크해 봤습니다.
교통체증에 시달리다 주유소에 들어온 차 운전자들의 평균 혈압은 142-87로 나타났습니다.
이에 비해 교통체증을 경험하지 않고 들어온 차 운전자들의 경우에는 123-78이었습니다.
혈압약을 먹던 사람이 그 약을 끊었을 때 나타나는 정도의 혈압 상승을 가져올 만큼 스트레스를 줬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다른 연구에서는 그 스트레스가 생각만큼 심하지는 않음이 밝혀졌습니다.
로스앤젤레스 주변의 유료 고속도로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한 분석결과를 보면, 사람들이 교통에 드는 1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지불할 용의가 있는 금액은 11달러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 지역 평균임금의 1/2 수준이라고 하는데, 다른 연구에서도 비슷한 분석결과를 얻었다는군요.

예를 들어 1시간을 일하면 22달러를 벌 수 있는데 그 시간을 노는 데 쓴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노는 데서 오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 22달러를 기꺼이 포기한 셈입니다.
이는 1시간 일하는 것을 싫어하는 정도를 금액으로 표시하면 대체로 22달러 정도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로스앤젤레스 부근에 사는 사람들은 교통혼잡에 시달리는 1시간을 회피하기 위해 11달러를 지불할 용의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교통체증을 싫어하는 정도가 일하는 것을 싫어하는 정도의 1/2에 해당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들이 교통체증에서 느끼는 스트레스의 수준이 일하는 데서 느끼는 스트레스 수준의 절반 정도라는 뜻도 되구요.

더욱 흥미로운 것은 교통체증으로 인해 극도로 화가 나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체증이 풀리고 차가 다시 원활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 화가 말끔히 풀린다는 관찰결과입니다.
The Economist의 그 기사를 쓴 기자는 바로 이것이 교통체증을 막기 위한 혼잡세(congestion charge) 도입이 어려운 이유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교통체증에서 오는 고통을 바로 잊어버리기 때문에 혼잡세 도입에 반대하는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보면 매년 명절 때마다 가장 교통혼잡이 심한 시간에 자동차를 몰고 귀성길에 오르는 사람들의 행태가 바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머리에는 작년의 끔찍한 경험의 잔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오직 고향을 다시 찾는 기쁨으로 가득 차있을 테니까요.
앞으로도 명절 때마다 고속도로가 거대한 주차장으로 변해 버리는 일은 끊이지 않고 계속될 겁니다.

 

beatrice
(2018/09/29 22:48)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

 
동훈학생,
(2018/09/30 10:02)

결혼한 친구들 얘기 들어보면, 고향 부모님 댁에 가기위해 10시간 넘게 운전해도, 가서 맛있는거 먹고 편히 쉴 수 있다는 생각에 몸과 마음이 편한 반면, 1시간 걸려 도착 하는 처가댁에 가는 순간은 그렇게 고통 (?) 스럽다고 합니다.

이걸 보면 도로 위에서 몇시간 있느냐 보다 어디에 가느냐가 스트레스에 영향을 주는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준구
(2018/09/30 14:03)

처가집 가는 데 1시간 걸리는 게 고통스럽다면 시집 가는 데
10시간 걸리는 며느리의 심정은 어떠할꼬?
자네 장가 가면 그렇게 이기적인 남편이 되지는 말게.

 
동훈학생,
(2018/09/30 14:27)

네! 명심하겠습니다!!

 
잠탱이
(2018/10/01 10:32)

교수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금새 잊어 버려요. 그리고 저 같은 경우는 시댁 가는 길은 덜 지루한데, 서울 오는 길은 마음이 무거워요. 그러니까 연휴를 여는 날과 끝나는 날의 차이가 있어요. 서울 오면 또 현실 ㅠㅠ

어떨때 보면 인간은 굉장히 부정적인 사고를 많이 하는 동물 같지만, 또 어떨때 보면 어느 순간에도 희망을 찾고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가기 전엔 막히면 지루하겠다 싶다가도 정작 도로에선 부부(가족)끼리 그 긴 시간동안 집중해서 대화를 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좋은 거 같다는 말을 하게 되더라구요.
그리고 애들 때문에 여행을 많이 못하는데, 강제로 여행 하는 맛도 있어요. 특히 추석은 밖같 풍경이 예쁘고 과일나무도 많이 보이고 하니 애들한테 해 줄 말도 많아요.
그리고 서로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 듣겠다고 해서 돌아가며 각 가족취향의 음악을 감상하는 기회가 되기도 해요. (이번엔 헬로카봇이라는 만화 주제가가 귀에 못이 박혀서 지금도 들리는 거 같아요)

 
TRobin
(2018/10/04 13:45)

헬로 헬로 나의 친구 카봇 우리들의 용감한 친구......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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