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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1 15:29    조회수 : 5823    추천수 : 25
 글쓴이   이준구
 파일   첨부파일없음
 제목   레시피 없이 파스타 만들기 - Oil pasta a la J.K.Lee



은퇴 후 이탈리아에 요리 유학을 갔다 온 다음 파스타 집을 열까 하는 생각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배운 적 없어도 파스타를 어느 정도 잘 만든다는 자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탈리아에 가서 정식으로 배우면 승산이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맛있는 파스타를 만드는 집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걸 보고 그 생각을 접었습니다.

거의 10년에 걸쳐 열흘에 한 번 정도로 집에서 파스타를 자주 만들어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2년 전인가 아내가 갑자기 이제 파스타는 그만 만들라고 말하더군요.
맛있는 음식점들 많은데 구태여 집에서 만들어 먹을 필요가 있느냐는 이유를 대면서요.

사실 그런 말을 한 배경에는 내가 만든 파스타에 질렸을 가능성이 있을지 모릅니다.
몇 년 동안이나 똑같은 파스타만 계속 만들었으니까요.
처음 몇 년 동안은 토마토소스 파스타만 만들었습니다.
그러다가 페스토소스 만드는 법을 배워 그 뒤 몇 년은 그것만 만들었습니다.

나처럼 입맛이 돌쇠인 사람이야 똑같은 걸 몇 년씩 먹어도 질리지 않지만 웬만한 사람들이야 질리게 마련이지요.
하여튼 지난 2년 정도는 집에서 한 번도 파스타를 만들어 먹지 않았습니다.

이런저런 파스타를 사먹다 보니 새로운 파스타를 개발해 보겠다는 욕심이 생기더군요.
예전에는 주로 토마토소스 파스타만 먹었는데 크림 파스타도 먹어 보고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도 먹어 보면서 점차 내 안목이 넓어졌습니다.
스스로 파스타를 만들어본 경험이 있는지라 음식점에 가서 먹어 보면 “아 이건 이렇게 만들면 되겠구나.”라는 아이디어가 저절로 떠오르더라구요.

최근 우리 대학 교수회관에서 미치도록 매운 오일 파스타를 먹어 본 후 나도 그걸 한 번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내도 한 번 만들어 보라고 권유하길래 드디어 한 달 전쯤 실행에 옮겼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아내가 대박 맛있다고 칭찬을 해주었으니까요.

그런데 아쉽게도 급하게 서두는 바람에 그때 인증샷을 찍어 놓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제는 딸까지 불러 놓고 다시 한 번 똑같은 파스타를 만들어 여기 보는 인증샷을 찍게 되었습니다.
아내와 딸이 맛있다고 먹어주는 게 무척 고마웠구요.

엄밀하게 말해 내가 만든 파스타는 음식점에서 파는 정통 오일 파스타와 다른 일종의 짝퉁입니다.
나는 레시피 보면서 음식 만드는 걸 아주 싫어하기 때문에 일부러 내 스타일대로 만들곤 합니다.
지인이 이탈리아 갔을 때 파스타 레시피 책 사다 줬지만 그건 책꽂이에 간수만 해두고 있습니다.

파스타는 이탈리아 국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국수 만드는 법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국물이 없는 비빔국수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만들면 된다고 봅니다.
파스타란 게 결국 국수를 적당히 삶고 거기에 적당히 만든 소스를 뿌리면 완성되는 아주 간단한 요리입니다.

어떤 음식점에 가면 파스타가 아주 짜서 거의 못 먹을 정도인 경우가 있습니다.
듣기에는 그게 이탈리아 정통 요리방식이라고도 하더군요.
파스타를 삶을 때 거의 바닷물에 가까운 염도의 물에 삶는다나요?

나는 거기서부터 내 고집을 꺾지 않습니다.
나는 파스타 삶은 물에 소금을 전혀 넣지 않습니다.
짠 걸 싫어나는 내 식성 때문인데, 자기 식성에 맞는 음식을 만드는 것이 요리의 기본 중 기본 아닌가요?
그러니까 난 레시피가 필요 없다는 거죠.

다만 나는 파스타를 알덴테(al dente)로 삶는 점에서만은 정통 방식을 따릅니다.
우리 국수는 부들부들해야 맛있지만, 파스타는 약간 빳빳한 맛이 나야 제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 입맛이 그러니 정통이든 뭐든 그런 방식으로 요리할 수밖에요.

파스타 삶는 데는 생각 밖으로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나는 파스타 만들 때 국수 삶을 준비부터 먼저 합니다.
물 올리고 국수가 다 삶아질 때까지 약 20분이 걸리는데, 그 동안 소스를 준비하면 되니까 30분 정도에 파스타 요리를 끝낼 수 있는 거죠.
그렇게 해서 내가 자랑하는 “초특급요리”가 가능해지는 겁니다.

어제 만든 파스타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간략하게 소개 드릴게요.
우선 마늘 얇게 썰은 것과 페퍼런치노(작은 고추 말린 것)을 기름에 볶아 마늘향과 매운맛을 우려냅니다.
그 다음 버섯, 양파, 올리브, 아스파라거스를 넣어 볶는데, 소금으로 약간의 간을 합니다.

내가 만든 파스타의 핵심은 그 다음 단계에서 넣는 해산물입니다.
나와 아내는 고기보다 해산물을 더 좋아합니다.
파스타에 넣을 수 있는 해산물은 새우, 조개, 관자, 게살 등 다양하지요.
그런데 관자나 게살은 너무 비싸기 때문에 어제는 새우와 바지락조개만 넣었습니다.
(싱싱한 꽃게 두어 마리 사서 살을 발라 넣으면 천상의 맛이 될 걸 잘 알지만, 그러려면 최소 4, 5만원의 돈이 듭니다.)

채소 볶은 데다 새우와 바지락조개를 넣고 계속 가열하면 새우는 붉게 익기 시작하고 익은 바지락조개는 입을 벌리기 시작합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요리가 거의 끝난 셈입니다.
이제 간만 맞추면 되니까요.
(조개에서 나온 염분이 꽤 되기 때문에 추가로 넣는 소금의 양은 의외로 적을 수 있습니다.)

이때 국수가 다 익었을 테니까 체에 받쳐 물을 빼고 큰 후라이팬에 올리브기름을 넣고 볶기 시작합니다.
볶을 때 마른 허브를 넣으면 향기기 더 좋아지겠지요?
근데 난 허브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그저 마른 바질 가루 정도 집어넣는 걸로 그쳤습니다.

사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허브향을 잘 알아서 꼭 뭐를 넣어야 한다는 게 있을 테지만 우리도 그걸 지켜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허브향에 익숙해지기 전에는 오히려 역할 수도 있구요.
그러니 무슨 허브를 넣는지에 그리 큰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볶은 국수 위에 아까 만들어둔 해물-채소 소스를 붓고 약간을 더 볶습니다.
적당한 온도로 뜨거워야 음식맛이 좋아지니까요.
이젠 그릇에 나눠 담고 그 위에 바질 잎으로 장식만 하면 모든 게 끝납니다.
바로 이 사진에서 보는 매콤한 오일 파스타가 완성된 것입니다.

난 음식 맛의 99%가 재료와 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맛있는 재료 쓰고 간을 적당히 맞춘다면 결코 맛없는 요리가 될 수 없는 거죠.
내가 어제 쓴 재료들은 결코 비싸지는 않지만 하나하나가 모두 좋은 맛을 내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다년간의 경험 덕분으로 나는 간 맞추는 데 아무 어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나는 이 파스타에 “Oil pasta a la J.K.Lee”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였습니다.
오일 파스타와 스파게티 봉골레의 중간쯤 되는 맛으로 정통 방식을 전혀 따르지 않았으니까요.
나만의 엉터리 요리법이지만 나름 자부심을 갖는다면 너무 심한 자만일까요?

여러분이 사진에서 보듯 파스타의 외양은 별로인 게 분명합니다.
나는 요리의 모양내는 실력이 꽝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모양내는 것 그 자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맛만은 나름대로 자신을 갖고 있습니다.

내 자랑이 너무 지나쳤나요?
여러분에게 일러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요리할 때 절대 겁먹지 말라는 겁니다.
내 입맛에만 맞으면 되니까 레시피고 뭐고 다 잊어버리세요.
내가 좋아하는 재료 듬뿍 넣고 내가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간만 맞추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지성
(2018/06/11 17:04)

선생님, 파스타 좀 먹어본 제 눈에도 맛깔스럽게 보입니다 ^^

 
이준구
(2018/06/11 17:40)

자네가 나를 추켜세워 주려고 일부러 그렇게 말하는 것이겠지.

 
HONey
(2018/06/11 20:05)

쌤님, 저도 만들어주세요~~~

 
이준구
(2018/06/11 20:24)

너 같은 부르조아는 돈 내고 먹어야 해.

 
전도리
(2018/06/11 21:24)

ㅋㅋ ..... 요리치인 저로서는 일단 콩나물국부터.. 잘끓이는 방법을 터득해야 할 것 같네요

헌이님이 교수님께 쿠사리 먹는 걸 보니 유쾌 통쾌 상쾌하네요 하하

 
이준구
(2018/06/11 21:24)

부지런히 연습하다 보면 곧 달인이 됩니다.
포기하지 마시구요.

 
전도리
(2018/06/11 21:42)

네에.... 알겠습니다.. 교수님^^

 
HONey
(2018/06/11 22:31)

전도리님, 제가 그간 전도리님께 잘못하거나 실수한 일이 있었나요? 유쾌 정도도 아니고, 유쾌 상쾌 통쾌까지나 하시다니... 있었는데 제가 지금까지 몰랐던 것이라면, 이 자리를 빌어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전도리
(2018/06/11 23:35)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이었군요...그런거 전혀 없구요... 헌이님은 잘하시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세월의 차이가 있나보네요 .. 농담으로 너머 갈 수 있는 말이었는데... 그렇게 받아들이신다면 내가 올드한 사람인가보네요

헌이님은 교수님의 훌륭한 제자세요^^

 
동훈학생,
(2018/06/12 07:26)

파스타 사진에서 건강한 지중해식 식단의 느낌이 물씬 풍깁니다.

이탈리아 사람이 먹어도 BUONO!(맛있다) 라고 외칠거라 확신합니다.

그런데 이 글 이후로 전국의 수많은 남편들이 잔소리를 듣지 않을까 염려 됩니다.

 
이준구
(2018/06/12 09:38)

이 게시판의 주독자층은 미혼 남녀들이기 때문에 그 점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일세

 
잠탱이
(2018/06/12 10:47)

교수님 파스타 너무 맛있어 보여요.
지난주에 77세 엄마 모시고 딸4명과 함께 이탈리아에 다녀왔습니다. 엄마가 걷기 힘들어 하셔서 관광하다가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식사를 해야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파스타가 모두 기대 이하였어요. 한국에서 먹는 수분기 많은 파스타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라요^^

 
이준구
(2018/06/12 14:02)

지금까지 먹어본 파스타나 피자 중 제일 맛없는 것은 이탈리아에서 먹었던 것입니다.
특히 관광지 주변에서 먹은 파스타나 피자는 재앙 수준인 것 같아요.
그 동안 우리나라의 수준이 상당히 올라갔다는 걸 실감할 수 있어요.

 
한여울
(2018/06/13 01:37)

교수님도 축제때 파스타로 요리 실력을 뽐내보시는건 어떠신지요

 
동훈학생,
(2018/06/13 07:19)

한여울 님 말씀처럼, 축제때 학생들 앞에서 요리 시연을 하시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 이지 않을까 생각 합니다.

 
이준구
(2018/06/13 10:24)

이건 대량으로 만들기 힘든 거라 대학축제는 어려울 것 같구요,
TV에서 시연한다면 한 번 해볼 용의가 있긴 하지요.

 
윗글 좀 걱정스럽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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