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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6 14:37    조회수 : 2456    추천수 : 37
 글쓴이   이준구
 파일   첨부파일없음
 제목   혼밥도 즐거울 수 있다 - 8천 5백원의 소박한 행복





정년을 맞고 나서는 아무래도 점심을 ‘혼밥’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오피스텔에 가 있는 날은 거의 영락없이 혼밥을 해야만 합니다.
오피스텔로 나를 찾아오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요.

처음에는 혼밥을 하는 게 뭔가 쓸쓸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거의 매일 동료 교수 혹은 제자들과 함께 먹다가 갑자기 달랑 혼자서 식사를 하는 처지가 되니 그럴 수밖에 없지요.
내가 뭐 고독을 특히 즐기는 사람도 아니구요.

다행히 오피스텔에서 5분만 걸어 내려가면 소위 “샤로수길”이라는 맛집 골목이 있습니다.
홍대입구나 경리단길처럼 핫한 곳은 아니라 할지라도 봉천동 지역에서는 그런대로 알아주는 맛집 골목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곳저곳 찾아다니면서 먹는 재미로 외로이 먹는 쓸쓸함을 이겨냈습니다.

그러다가 단골집이 생기기 시작하고서부터는 오히려 혼밥을 하는 게 즐거워졌습니다.
내 단골집이 된 곳은 “옛날육개장”이라는 평범한 간판을 달고 있는 곳입니다.
아주 화려한 곳은 아니고 평범한 밥집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이 될 겁니다.

처음에는 육개장뿐 아니라 된장찌개도 먹어보고 김치찌개도 먹어보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 육개장이 제일 좋았고 어느새 그것이 내 고정 메뉴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그 집에 들어서기만 하면 으레 육개장을 내올 정도가 되었습니다.
(첫 번째 사진이 내가 늘 먹는 바로 그 육개장 식사입니다.)

그 집의 좋은 점은 모든 음식이 가정식으로 나와 마치 집에서 식사를 하는 기분이 된다는 데 있습니다.
게다가 몇 번 찾아가다 보니 그 집 주인장 내외분과 친하게 되었습니다.
사람 좋은 그 분들과 이런저런 세상 얘기 하는 게 너무 좋더군요.
이제는 그 분들의 자제들이 무슨 일을 하며 요즈음 뭐를 하고 지내는지까지 알 정도가 되었습니다.

또 하나 좋은 점은 그 분들이 내 식성을 알고 거기에 맞춰 상을 내온다는 겁니다.
나는 음식점에 가서 반찬 남기는 걸 무척 싫어합니다.
음식 쓰레기 만든다는 사실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때문이지요.
그래서 나는 그 집에 처음 갔을 때 반찬 조금씩만 놓으라고 신신당부를 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난 의사들의 권유에 따라 가능한 한 국물을 조금만 먹으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국물을 많이 먹어 염분 섭취가 과다한 경향이 있다고 하지요.)
처음에는 거의 손도 안 댄 것처럼 육개장 국물을 남기니까 주인 아저씨가 이상하게 생각하시더군요.
구수한 육개장 국물이 특히 자랑인데 그걸 안 먹으면 어떡하냐구요.

이젠 내 식성을 알아 밑반찬도 조금씩만 내오고 육개장도 국물을 적게 담아 내옵니다.
누가 나를 알아준다는 건 너무 기분 좋은 일이잖아요.
그래서 그 집을 찾아 육개장을 먹고 나오면 늘 기분이 좋답니다.

그 집을 나와서는 길을 건너 “아띠”라는 베이커리로 갑니다.
(두 번째 사진이 바로 그 베이커리입니다.)
그 빵집 주인은 유기농 효모를 써서 맛있고 건강한 빵을 만든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동네에서는 나름 맛있는 빵을 만들어 파는 가게로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 집에서 사는 빵도 거의 정해져 있습니다.
아침으로 먹을 빵인데, 버팔로라는 이름이 붙은 너트와 건포도가 들어 있는 건강빵입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그 빵 한 조각을 올리브기름에 구워 먹지요.
거기다 과일 몇 쪽과 우유를 곁들여 먹으면 훌륭한 아침식사가 되는 거지요.
(나는 지난 20년 가량 그런 방식으로 아침 식사를 해왔습니다.)

하도 자주 빵을 사러 가다보니까 거기 사장님이 이제는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평소 빵에 대해 궁금했던 이런저런 걸 물어볼 기회가 생겨 좋더군요.
빵을 썰어주는 알바 아가씨가 자주 바뀌어 얼굴이 조금 익으려 하면 떠나 버리는 게 조금 아쉽기는 합니다.

내가 빵을 산 다음 꼭 들리는 곳은 “쥬씨”라는 커피샵입니다.
(세 번째 사진이 바로 그 커피샵입니다.)
나는 거기서 늘 뜨거운 카페라테를 테이크아웃하는데, 값이 1,500원으로 아주 쌉니다.
그렇지만 커피 맛은 4, 5천원 하는 곳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낍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듯 내 입맛은 까다로움과는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어느 날 커피 만들어주는 아가씨가 나를 알아보고 “뚜껑 안 덮으시죠?”라고 묻더군요.
늘 뚜껑은 도로 빼놓고 커피만 들고가는 걸 기억했던 겁니다.
내가 뚜껑을 덮지 않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뚜껑 덮고 작은 구멍으로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 혀나 입천장에 최소 1도 정도의 화상을 입기 십상이기 때문이죠.

그 다음부터는 내가 언제 가든 커피샵의 아가씨들이 날 알아보고 반가운 인사를 보내줍니다.
이런 작은 훈훈함이 너무나 기분 좋지 않습니까?
그냥 무표정한 얼굴로 커피와 돈을 맞바꾸는 것에 비하면 너무나 기분 좋은 일이지요.

내가 점심으로 먹은 육개장의 값은 7천원입니다.
그러니까 커피까지 합해서 8천 5백원의 적은 돈만 내고도 행복한 점심 한 끼를 먹은 셈이지요.
혼밥을 먹고서도 즐거울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런저런 사람들과 나누는 훈훈한 마음에 있습니다.

무라까미 하루끼라는 일본 작가가 “소확행”(小確幸)이란 말을 했다지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뜻으로 말이지요.
만약 내 삶에 소확행이라는 게 있다면 8천 5백원을 내고 혼밥으로 먹은 내 하루 점심 식사가 그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동훈학생,
(2018/06/07 12:52)

제가 경험한 식당 육개장은 거의 다 조미료가 들어가서 먹고 나면 항상 속이 더부룩 했는데, 다음에는 교수님께서 즐겨 찾으시는 위 집에 들러보고 싶습니다.

이 글 이후로 더이상 혼밥을 안 하시게끔 여기저기서 점심 제의가 들어 왔으면 좋겠습니다.

 
이준구
(2018/06/07 13:45)

혼밥하는 것도 나름대로 즐거우니 염려 말게.
여기 가서 육개장 한 번 먹어보는 것도 좋을듯.
관악구청 맞은 편에 있다네.
언제 학교로 찾아 오면 나와 함께 갈 수 있는데.

 
동훈학생,
(2018/06/07 20:27)

교수님 찾아뵐 때 제가 꼭 한번 모시겠습니다!

 
사범생
(2018/06/07 22:57)

교수님, 잘 지내시는 것을 글로 읽게되니 참 기쁩니다^^ 저 파주 강군입니다!

한 번 안부를 여쭌다는 생각만하고 있었는데, 마침 이렇게 최근 모습도 함께 올려주셔서 반갑기가 무량합니다. 더군다나 교수님의 '소확행'을 알려주셔서 더 기쁘구요^^

저는 정신없이 재미있는 조교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경제학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하고있는데, 역시나 어렵습니다ㅠㅜ

언제 청주에 오시면 꼭 연락주세요~ 성하의 계절이 되면 무더운 서울대 캠퍼스를 거닐던 두 해의 여름이 생각납니다^^

 
This is written in Eng.
(2018/06/08 22:31)

교수님은 맛집 걱정 별로 안 하실 것 같으셔서 부럽네요 ㅋㅋ

 
이준구
(2018/06/09 14:17)

강군, 잘 지내고 있지?
나도 파주에 민물매운탕 먹으러 한 번 간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군.
언제 기회가 있겠지.

어디로 가서 식사를 할지 걱정하지는 않죠.
입맛이 둔한 사람의 행복입니다.

 
msjasmine
(2018/07/03 17:23)

글만 읽어도 교수님이 당신 삶을 바라보는 행복한 시선을 느낄 수 있어 덩달아 저도 기분이 좋아지네요. 덤으로 교수님 모습이 찍힌 사진까지 !! 힐링하고 갑니다 교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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