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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5 11:21    조회수 : 14461    추천수 : 101
 글쓴이   이준구
 파일   첨부파일없음
 제목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What Money Can't Buy)


오래 전 이 게시판에서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M. Sandel이 쓴 What Money Can't Buy라는 책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시장의 논리가 적용되는 범위가 넓어질수록 우리의 삶은 더욱 풍요로워질 거라는 환상을 갖고 있습니다.
철학자인 Sandel은 이와 같은 경제학자들의 잘못된 믿음에 본질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에 가격을 붙여 거래의 대상으로 삼는 사회가 되는 것이 정말로 바람직한 일일까요.
예를 들어 사람의 신장, 간, 췌장, 안구에 가격표를 붙여 마음대로 사고 팔게 만들면 어떨까요?
또한 옛날의 노예제처럼 사람 그 자체를 거래의 대상으로 삼으면 어떻구요?

그 책에서 Sandel은 가격을 붙여 거래의 대상으로 삼으면 안 될 여러 가지 사례를 들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놀이동산의 급행표입니다.
놀이동산에 갔는데 롤러코스터 앞에 긴 줄이 늘어서 2시간이나 기다려야 내 차례가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급행표를 산 사람은 줄을 서지도 않고 맨 앞에서 끼어들 수 있다는 겁니다.

2시간을 기다린 여러분들 앞에 방금 거기에 온 한 사람이 끼어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 되겠습니까?
끼어들 권리를 정당하게 돈 주고 샀으니 시비거리가 될 이유가 없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놀이동산이 아니고 병원의 응급실이 그런 시스템으로 운영된다면 어떻겠습니까?

병원의 응급실에 VIP 전용 창구를 따로 만들어 비싼 돈을 낸 사람만 우선적으로 처치해 주는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돈 많은 사람들이 비싼 돈을 내고 좋은 서비스를 받는 게 배가 아파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시스템하에서 우리 같은 서민들이 이용하는 보통의 응급실 서비스는 틀림없이 악화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그런 결과가 빚어질 것은 뻔한 일 아니겠습니까?

며칠 전 카카오 택시가 즉시 배차나 우선 배차에 유료 서비스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 발표를 듣는 순간 나는 Sandel의 놀이동산 급행표를 머리에 떠올렸습니다.
택시를 남보다 앞서 잡을 수 있는 권리에 가격을 붙여 사고 판다는 아이디어니까요.

업체에서는 급하게 택시를 이용해야 할 사람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니 좋은 일 아니냐고 말합니다.
나 역시 정말로 급할 때는 '따블'이나 '따따블'을 내더라도 택시를 잡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택시 우선 배정의 유로화는 택시요금에 웃돈을 붙이는 것을 시스템화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제도가 정착되면서 무슨 결과가 일어날지 상상해 보십시오.
웃돈을 내지 않고 택시 잡기는 점차 힘들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모두가 웃돈을 내고 택시를 잡게 되면 실질적으로 택시 요금이 오른 것이나 마찬가지인 결과가 빚어집니다.

만약 우선 배정을 위해 지불한 웃돈이 택시 운전자에게 모두 돌아간다면 나는 그나마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택시를 타면서 늘 그들의 어려운 삶에 대해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들은 터라 그들의 주머니를 조금이라도 두둑하게 만들어 준다는 데 굳이 꼬장을 부릴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업체도 그 중 상당 부분을 이윤으로 가져가려고 하는가 봅니다.
그 발표가 나오자 그 업체의 주식 가격이 반짝 오른 것을 보면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요.

만약 공식적으로 모든 택시 요금에 5천원을 할증해 받는다면 택시 잡기가 지금보다 훨씬 더 수월해질 겁니다.
구태여 카카오 택시 서비스를 유료화하지 않더라도 그 방법으로 택시 잡는 어려움을 해소시킬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쪽이 더욱 공평한 시스템이라고 믿습니다.
어려운 살림의 택시 운전자들에게 더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장점도 있구요.

그런데 왜 그런 요금의 인상을 선뜻 실전에 옮기기 못할까요?
택시 요금 인상이 가져오는 여러가지 부작용 때문이 아닐까요?
당장 서민들의 생계비 부담이 늘어나는 문제가 생길 테고, 다른 대중교통 수단 요금도 들먹거릴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카카오택시 서비스의 유료화가 실질적인 택시요금 인상이란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기술혁신을 빌미로 공연히 업체의 배를 불리는 결과만 가져올 것이 뻔합니다.

급하게 택시를 타야 할 사정이 있는 사람이 웃돈을 내고 택시를 우선적으로 배정 받는 것은 효율성의 측면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급하게 타야 할 사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남보다 더 많은 돈을 갖고 있어 웃돈을 낼 용의를 갖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 경우에는 효율성의 측면에서 하등 긍정적 효과가 없습니다.

우리 삶에서 어차피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살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음식 맛이 좋기로 이름 난 레스토랑은 문 앞에서 오랜 시간을 줄서서 기다려야 비로소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또한 좋은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려면 밤새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고도 하더군요.

이런 상황이 한 두 개가 아닌데, 이런 모든 상황에서 급행표를 도입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난 레스토랑 앞에서 한 시간을 기다렸는데 방금 나타난 어떤 부자가 10만원을 내밀면서 먼저 들어가는 걸 보고 싶으십니까?
나는 경제학자지만 모두가 공평하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시스템이 훨씬 더 좋다고 믿습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모든 것에 가격을 붙여 거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은 분명히 거래의 대상에서 제외시켜 놓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돈의 힘이 적용되지 않는 영역을 충분히 남겨 두어야만 비로소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Silence
(2018/03/15 15:56)

지난 주 은행을 갔는데 어떤 교수님이 대기인 10명을 제치고 창구로 직행하시더라구요..외화 환전하러 오셨는데 아는 분이 해주실거라고 ㅎㅎ

 
이준구
(2018/03/15 16:54)

카카오 택시 유료화는 이런 걸 제도화한다는 데 문제가 있어요.
아무나 어떤 거리낌도 없이 떳떳하게 다른 사람들을 제칠 수 있게 만드니까요.

 
홈런볼
(2018/03/15 22:24)

교수님 글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사례가 있었습니다. 지각을 한 사람에게 벌금을 매기는 제도 말입니다. 그 결과는 지각을 돈으로 산다는 인식을 가져서 오히려 당당하게 지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수님 말씀대로 돈으로 사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카카오 택시가 시작되고 다른 기업들이 이를 따라한다면 사회가 더 삭막해질 것 같아 걱정이 앞섭니다.

 
임형찬
(2018/03/17 17:27)

카카오 택시 유료 서비스(우선배치)는 위치재의 특징을 악용한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교수님께서 자주 언급하시는 교육 서비스가 위치재로서 경쟁적 소비를 일으키는 것은 서수적 편익에 대한 불안감 때문입니다. 즉, 순위 게임인데, 서비스를 소비한 만큼의 편익을 지출 시점에서는 알 수 없고, 장기적으로 상당한 시간이 지나야만 알 수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서비스를 공급하는 자(교육자)의 역량이 어느 정도 수준의 값어치인지는 지출 당시에는 알 수 없습니다.

여기도 일종의 정보 비대칭에 의한 개살구 시장이 형성되니 불안한 마음에 경쟁적으로 소비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카카오 우선 배차의 경우에는 '상대적 우선 배차'일 뿐 그게 얼마나 타인들에 비해 우선되어 배차 되는지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카카오측의 우선 배차라는 관점이 과연 가격대비 얼마나 편익을 제공하는지 수요자 입장에서는 알 길이 없고, 일단 택시를 이용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계속 불안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겠지요.

그리고 고의적으로 전산상 정상적 배차를 방해해서 우선배차를 유도할 수도 있습니다.

즉, 애초에 택시의 공급이라는 시장 상황을 전혀 알 수 없고, 실제 수요자(승객)들과 공급자(택시)가 존재하는 협소한 시장(물리적으로 한정된 공간)의 불확실성을 악용하는 것이지요.

유일하게 카카오 측은 전산적으로 특정 공간에서 공급을 효율적으로 배분이 가능할 것인데, 그걸 제대로 배분할지도 의문이거니와 일단 시행하면 결국 모두가 유료 서비스를 쓸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임형찬
(2018/03/17 17:29)

아무튼 평소 때 가졌던 의문에 대해서 명쾌하게 알게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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