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 로그인
회원가입 | ID/PW찾기
Home > 게시판

2017/11/29 14:26    조회수 : 18133    추천수 : 19
 글쓴이   이준구
 파일   첨부파일없음
 제목   "사망세"(death tax)를 위한 변론


상속세의 영어 표현은 ‘estate tax’ 혹은 ‘inheritance tax’입니다.
엄밀하게 말해 상속세는 죽은 사람의 재산에 대해 부과할 수도 있고, 그것을 물려받은 사람에 대해 부과할 수도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를 estate tax라 부르고, 후자의 경우를 inheritance tax라고 부릅니다.
나라마다 이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로 상속세를 부과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상속세를 ‘death tax’라고 부르는 경우도 종종 목격하게 됩니다.
이 표현은 영미언어권에서 주로 상속세 부과에 반대하는 보수파들이 즐겨 쓰고 있지요.
죽은 사람에게서도 거둬가는 잔인한 세금이라는 의미에서요.

흥미로운 점은 스스로 자유주의적(liberal) 입장을 가졌다고 밝히고 있는 Economist지가 이 death tax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이 세금을 두둔하는 기사를 최근 두 번이나 올렸다는 사실입니다.

“The Case for Death Duties,” October 2007
“The Case for Taxing Death; Inheritance,” November 2017


자유주의적 입장이라면 보수적 입장과 상당히 비슷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걸 잘 아실 겁니다.
보수적인 입장의 Economist지가 상속세를 지지하는 흥미로운 현상을 관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외국이나 우리나라나 보수적 성향의 사람들은 대체로 상속세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갖고 있는데 말이지요.

Economist지는 상속세가 효율성과 공평성 모두에서 장점을 갖고 있는 세금이라고 말합니다.
우선 상속세는 근로의욕의 감퇴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효율적이라고 지적합니다.
상속세의 부과는 오히려 근로의욕을 적극적으로 부추기는 성격이 있다고 말합니다.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상당한 금액의 상속을 받은 사람은 노동시장에서 이탈해 나갈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W. Buffet과 B. Gates가 부시행정부의 상속세 폐지 움직임에 반대하면서 내놓은 논리도 바론 이런 것이었지요.)

또한 상속세의 부과는 저축이나 투자행위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다는 장점을 갖는다고 말합니다.
이 점에서 볼 때 소득세나 법인세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낫다는 것입니다.
Economist지는 현존하는 여러 가지 조세 중 경제행위를 교란하는 효과가 가장 적은 것이 바로 이 상속세라고 지적합니다.

공평성의 측면에서 상속세가 바람직하다는 것은 구태여 길게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합니다.
T. Picketty가 적절하게 지적했듯 지금 세계의 자본주의체제는 세습자본주의(patrimonial capitalism)의 길로 치달리고 있습니다.
어떤 개인이 얼마나 많은 능력을 가졌고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가 아니라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는지가 경제적 성공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는 체제가 되어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경향은 Economist지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필연적으로 돈이 지배하는 금권정치(plutocracy)의 등장을 가져오기 마련입니다.
상속세가 이와 같은 문제를 전적으로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억제장치 역할은 할 수 있다는 것이 Economist지의 주장입니다.
이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여지는 그리 커보이지 않습니다.

상속세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소득을 얻을 때 이미 소득세를 냈는데 상속세를 부과하면 이중과세(double taxation)를 하는 셈이 된다고 지적합니다.
이에 대해 Economist지는 다음과 같이 통쾌한 반박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중과세가 그렇게 심각한 문제라면 정부는 부가가치세부터 폐지해야 할 것이라구요.
소득세를 내고 얻은 소득에서 지출하는 것인데 물건 샀다고 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이중과세가 아니냐는 반론이지요.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도 상속세에 문제가 많다는 언론 보도가 자주 등장합니다.
중소기업이 무거운 상속세 부담 때문에 상속이 되지 못하고 매각되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구요.
그런데 중소기업이 반드시 2세에게 상속되어야 마땅하다는 명확한 논리가 존재하나요?

T. Picketty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습자본주의체제는 육상종목의 올림픽 대표선수를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선발하는 것을 의미한다구요.
즉 어떤 선수 자신이 얼마나 잘 뛰는지에 의해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가 금메달을 탔는지의 여부로 선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구요.

음식점이나 가내 수공업 같은 것이야 가업을 전승하는 것이 바람직할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상당한 수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는 기업이라면 경영 능력이 가장 탁월한 사람이 운영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그것이 사회에게도 가장 큰 편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자원배분 방식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중소기업을 2세에게 넘겨주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욕심일 뿐입니다.

중요한 점은 설사 상속세를 내기 위해 그 기업을 매각한다 하더라도 기업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누군가가 그것을 매입해 새로운 경영진이 그 기업을 운영하게 되겠지요.
그 새로운 경영진이 2세에 비해 능력이 떨어진다고 말할 하등의 근거가 있나요?

Economist지 역시 이 문제를 인식하고 다음과 같은 해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상속세를 한꺼번에 납부하게 하지 말고 현금흐름이 확보됨에 따라 점차적으로 납부할 수 있게 만들어주면 된다구요.
그렇게 되면 상속세를 내기 위해 갑자기 기업을 팔아야 할 필요가 없어지니까요.
일리가 있는 지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가 상속세를 거의 이름만 남은 수준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는 미국 하원은 2025년까지 상속세를 폐지하려는 계획을 통과시켰다고 합니다.

Economist지는 상속세 폐지를 주장하는 것이 정치적으로는 유리할지 몰라도 경제적 측면에서는 아주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효율성과 공평성의 측면에서 다른 조세보다 상대적으로 더 우월한 상속세를 무력화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장점이 많은 상속세를 적극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이지요.

지금 우리 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상속세 관련 논의에서 이와 같은 상속세의 장점이 충분히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대부분의 언론이 너무 무거운 상속세 부담이 중소기업의 2세 승계에 미치는 영향만을 문제삼고 있는 듯 보입니다.
바로 전에 지적했듯, 2세 승계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한 본질적인 논의는 완전히 실종된 상태에서요.

상속세 문제에 관해 좀 더 균형있는 시각을 얻기 위해 앞에서 소개한 두 개의 Economist지 기사를 정독하기 바랍니다.
보수적 언론이 중립적 입장에서 이 문제에 대해 올곧은 평가를 하고 있음을 바로 알 수 있을 겁니다.

 

잠탱이
(2017/12/01 09:23)

어젯밤에 주진형씨 페이스북에서 교수님의 이 글을 언급하고 링크해 놓아 읽게 되었습니다.(그 분도 늘 교수님의 새글을 챙기시나봐요)
지난번 부동산보유세에 이어서 수직적 공평성뿐 아니라 보수들의 주장을 반박할만한 '효율성' 측면도 동시에 충족하는 조세라는 점이 흥미롭네요.

 
이준구
(2017/12/01 11:30)

부동산세와 상속세가 효율성의 측면에서도 다른 세금에 비해 우월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분명한 일입니다.
다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두가 입을 닫고 있어서 그런 말을 듣기 힘들 뿐입니다.

 
지성
(2017/12/04 12:53)

선생님, 수많은 제자들이 항상 응원하고 있습니다.

제가 현장에서 실무를 담당하면서 느끼기에는 중소기업의 상속 부담이 과한 수준은 아닌 듯 합니다. 국채금리 수준의 비용을 지불하고 연부연납을 이용할 수 있으며, 혹여 지분담보 대출을 이용하더라도 금리가 낮아서 배당금으로 상환 가능한 수준인 듯 합니다.

상속세를 줄이기 위해 많은 2세들이 젊은 나이에 중소기업 경영 일선에 뛰어들어 일하고 있는데, 제가 만나본 사람들은 똑똑하고 열정도 있으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분들은 일찌감치 회사에 헌신하며 상속세도 많이 줄이고 있어, 가업을 이어가지 못할 만큼 과한 부담은 아닌 듯 합니다.

 
윗글 정운찬 선생님께서...
아랫글 미국 임진왜란 매니아의 역사 다큐